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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 신학을 작곡하다
바흐 신학을 작곡하다
저자 : 강일구
출판사 : 동연
출판년 : 2012
ISBN : 9788964471708

책소개

하늘의 시민 바흐가 전한 구원의 메시지!

『바흐 신학을 작곡하다』는 신학과 음악을 조화롭게 융화하였던 음악가 ‘바흐’의 사상을 그가 남긴 ‘마태수난곡’을 중심으로 탐구한 책이다. 호서대학교 총장으로 재직 중인 저자 강일구는 바흐가 마태복음서에 있는 예수의 고난을 음악의 구성 형식을 빌려 표현하였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인간의 원죄로 침해된 하나님의 공의를 순수한 죽음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십자가 중심의 신성의 차원으로 승화시켰다는 것이다. 바흐의 음악적 메시지를 루터와의 관계 속에서 풀어냄으로써 성서적 복음과 십자가를 음악적 표현양식의 중심으로 두었던 바흐의 사명을 발견하도록 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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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음악과 신학의 창조적 융합
인간의 삶에서 종교와 음악은 떼려야 뗄 수 없다. 알수록 신비한 융합이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음악을 살펴보면 그의 신앙이 보이고, 그의 신앙을 살펴보면 그의 음악이 보인다. 한마디로 바흐는 신학을 작곡했다. 동시에 그는 음악을 신학의 전당에 올렸다. 신학과 음악을 조화롭게 융화했던 인물, 그가 바로 바흐이다.
일반적으로 바흐의 곡들은 재즈로 편곡하기 쉬운데 베토벤의 곡들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어느 음악가는 바흐의 음악이 시스템보다는 음악적 기본에 충실해서 그럴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그 말이 맞다면 재즈는 바흐의 바로크 음악 토대 위에 있는 것이 된다. 모던 재즈를 이해하기 위해 옛 바흐에게 돌아가야 하는 것, 즉 현재를 위해 과거로 돌아가는 것,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 근본이 되는 것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뜻을 잘 표현하는 라틴어 단어가 있는데, “ 아드 폰테스(ad fontes)”는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다.
바흐는 마치 성지를 순례하듯이 근원으로부터, 성서로부터, 복음의 핵심으로부터 한 걸음 한 걸음 따라 걸으면서 옛것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간 인물이다. 바흐에게서 바로 이것을 배워야 한다. 음악과 신학의 창조적 융합! 옛 시대와 새 시대의 창조적 융합! 우리가 바흐의 〈마태수난곡〉 작곡발표회에 초대받아 이 신비롭고 창조적인 융합을 함께 경험하고 배울 수 있다면 그만한 기쁨이 없을 것이다.

바흐의 사상을 그의 불후의 명곡 〈마태수난곡〉을 중심으로 탐구한 이 책에서 저자가 기대하는 바가 있다. 첫째, 이 책은 바흐가 훌륭한 신학자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기독교 신앙이 흔들리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 〈마태수난곡〉이 표현하는 고전적 주제가 기독교 신앙의 길잡이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메마르고 화석화되어 가는 기독교 신앙에 〈마태수난곡〉은 영적인 묵상과 깊이를 더해 줄 수 있다. 넷째, 교회에서 잊어버렸거나 등한시해 온 교회 예전의 경건함을 재발견할 수 있게 도울 수 있다. 다섯째, 복음의 내용으로 돌아가게 해줌으로써 기독교 신앙에 참된 활력을 되찾아 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기대한다.

신학자 요한 세바스찬 바흐
요한 세바스찬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는 음악가, 즉 교회음악 작곡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가 음악 형식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내용들을 잘 살펴보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구원의 메시지를 음악으로 강렬하게 구현하려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바흐는 기독교 신앙의 차원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학을 표현한 훌륭한 신학자로 인식될 수 있다.
바흐의 〈마태수난곡〉 가사에 나타난 주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속죄의 행위로서 강렬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4세기 말의 위대한 신학자였던 나지안젠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en)가 말했던 ‘희생자 그리스도’라는 구속 이해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11세기 위대한 신학자 캔터베리의 안셀름(Anselm of Canterbury)의 ‘그리스도의 희생’이 보여주는 구속 이해와 다르지 않다. 안셀름의 이론은 ‘만족설’이라 알려지기도 했다.
바흐는 이 세상의 시민이지만 동시에 하늘의 시민이었다. 이것이 지상의 모든 경험에 의존하는 것으로부터 그를 자유롭게 하였다. 그래서 바흐는 삶의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사랑했다. 영원한 세계를 갈망하며, 이 열망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바흐를 신앙으로부터 분리해서 보면 올바로 볼 수 없다. 무신론자 니체(Nietzsche)가 1870년 4월 30일에 제자 로데(Erwin Rhode)에게 “금주에 나는 바흐의 거룩한 마태수난곡을 세 번째로 들었다. 매번 말할 수 없는 감탄하는 마음으로 듣곤 한다. 아마 기독교를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이라 할지라도 바흐 음악을 들으면 그것은 복음처럼 들린다.”는 말을 남긴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바흐는 단지 새로운 것을 창조해서 문제의 해결을 이끈 것이 아니라, 성서로부터 고대교회, 중세교회, 종교개혁에서 언급되고 재확인 된 신앙 내용을 음악이란 수단으로 새롭게 통전적으로 표현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이레니우스, 빈센트, 레오1세의 “비창조적 신학”이라는 틀과 구조가 같다. 바흐가 교회사에 나타난 여러 신학자들과 같은 양태의 틀을 사용하고 그 대본(text)을 성서로 삼고 또한 전통적인 교회의 예전적 양식에 정통해 있는 바흐가 음악적 표현을 통해 구원의 메시지를 나타내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다면, 바흐 그는 분명히 신학자이다. 바흐는 마태수난곡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강조하며 성서적 본문을 사용함으로써 메시지를 전달하는 신학자의 사명과 자질을 우리에게 충분히 보여주었다. 바흐 그는 훌륭한 신학자로서의 소임을 다했다.

바흐의 〈마태수난곡〉 신학
‘승리자 그리스도’를 주장하는 마르틴 루터의 신실한 추종자이며 루터 교회의 신자였던 바흐가 어떻게 루터가 공격했던 중세교회의 구속이론을 수용하여 이 〈마태수난곡〉 가사에 반영했을까?
이 의문을 풀기위해서 1740년대에 처음 등장한 바흐의 〈마태수난곡〉 가사 내용(text)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가사가 선택되고 배치된 면면들을 분석하여 〈마태수난곡〉의 가사에 나타난 바흐의 ‘구원이해’를 신학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바흐의 마태수난곡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근심스럽게 묻기를 “주여 내니이까 내니이까?” 할 때에 “바로 저입니다. 제가 회개해야 됩니다.” 라는 대응 합창에서 우리는 교회의 음악적 상징을 보게 된다. 이 상징이 의미하는 바는 이 합창을 듣는 크리스천이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에 응답하고 있다는 신앙적인 표현인 것이다. 바흐의 동시대인들은 교회 음악을 하나의 축제적인 톤으로 작곡했지만, 바흐는 교회 음악을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원칙으로 작곡한 것이다.
또 바흐의 음악적 메시지는 루터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해야만 제대로 이해 될 수 있다. 교회 음악의 영역에서 바흐는 루터가 주장하는 바를 더 높은 경지의 예술로 승화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바흐는 마태복음서에 있는 예수의 고난을 음악의 구성 형식을 빌려 표현하였다. 즉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에 대한 그의 사랑 때문에 고난 받고 죽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원죄와 죄로 침해된 하나님의 공의를 그의 순수한 죽음으로 충족시키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로 더 이상의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침해 없이 원죄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고난 받고 죽었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는 바흐와 동시대인으로 유명한 계몽주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라이마루스의 이신론(理神論)적 그리스도 이해와는 그 출발점부터가 다른 것이었다.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 역사가 폭 넓게 보여주었듯이, 구원에 대한 만족설이 “헌신”에서 “교리”로, 그리고 “묵상과 기도”에서 “체계적 신학”으로 변하면서 많은 문제점들이 생겨났다. 신론이 그렇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묘사가 그렇고, 또 성서 해석의 문제 같은 것들이 그러했다. 예배 의식과 성례전적 분위기를 제거함으로써 무미건조하게 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십자가의 신비를 그의 몸값을 요구하는 하늘의 폭군처럼 생각하게 하는 것 등이 그 예가 된다.
바흐의 〈마태수난곡〉은 “보상(perfection)”을 기독교 복음의 중심이 되게 하고 기본적인 주장으로 바꿈으로써 “보상”의 원래의 정신을 되찾게 하는 것에 일조 하고 있다. 신실한 루터교 신앙을 가진 바흐가 〈마태수난곡〉에서 종교개혁과 함께 중세 신학의 재발견에 도달했다는 것은 참으로 특기할 만한 일이다. “오 피투성이가 된 그의 머리(O Haupt voll Blut und Wunden)”는 독일어판 중세 찬송가였고, “아름다운 예수(Herzliebster Jesu)”는 중세 묵상을 운문화한 것이며, 그리고 죄 없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킨 것으로서의 구원의 교리는 바로 중세의 교리 속에 있는 것이었다.
“십자가 중심”과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킨다”는 점은 안셀름과 루터의 공통된 시각이다. 이것은 부활과 영광의 신학을 같은 위치에 놓는 동방교회(Greek Orthodox Church)와 구별된 전형적인 서방 라틴교회(Latin Church)의 특징이다. 서방 라틴교회의 전통을 따랐던 바흐에게도 십자가의 신학이 중요한 것이었다. 오히려 부활은 그에게 보상이론(만족설)이 불충분했던 이유일 뿐이었다. 그것도 직접적인 부활 언급이 아니라 간접적인 방법으로 영창이나 합창이 아닌 서창에서만 예언을 상기시킬 뿐이었다. 그것은 바흐가 “구원”의 중심요소가 “죄지은 인간”과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뚜렷하게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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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정보

머리말

제1장 왜 바흐의 마태수난곡으로 초대하는가?
제2장 바흐의 바로크적 삶, 신앙, 음악세계
제3장 바흐의 신학적 배경과 루터의 영향
제4장 바흐를 위한 고대교회의 유산
제5장 바흐를 위한 중세 안셀름의 신학
제6장 바흐가 이해한 그리스도의 죽음
제7장 바흐의 마태수난곡의 신학적 의미
제8장 바흐의 신학적 연주를 마치며

참고문헌(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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