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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다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노무현 자서전)
저자 : 노무현재단^유시민
출판사 : 돌베개
출판년 : 2010
ISBN : 9788971993866

책소개

노무현 대통령 서거 1주년 기념 자서전

노무현 사후 자서전『운명이다』. 이 책은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1주기를 맞아 고인이 남긴 저서, 미발표 원고, 메모, 편지 등과 각종 인터뷰 및 구술 기록을 토대로 정리한 자서전이다. 출생부터 서거까지 일목요연하게 시간 순으로 살펴보며, 기록의 일관된 문체를 위해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정리를 맡았다. 고인의 모든 자필, 구술 기록물을 살펴 일대기로 정리하고, 빈틈은 유족과 지인들의 인터뷰, 공식 기록 등으로 보완했다. 고인이 남긴 여러 기록들 중 퇴임 후 서거 직전의 미완성 회고록 노트를 기본으로 문체를 통일했다. 유족과 재단 관계자들 및 지인들의 검토를 통해 사실관계를 철저히 확인하여 오류 가능성을 최소한 줄이고자 했다. [양장]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출판사 서평

인간 노무현, 인권운동가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의 꿈과 희망,
실패와 좌절의 이야기를 한 권으로 읽는다!


“20년 정치인생을 돌아보았다. 마치 물을 가르고 달려온 것 같았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었다고 믿었는데, 돌아보니 원래 있던 그대로 돌아가 있었다. 정말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길이 다른 데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대통령은 진보를 이루는 데 적절한 자리가 아니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무엇으로,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 것일까?”
―본문 중에서

노무현 대통령 서거 1주기 기념 출간!

“노무현 대통령 서거 1주기를 맞아 이 책을 펴냅니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책은 이미 많이 나왔고 앞으로도 더 나오겠지만, 출생에서 서거에 이르기까지 인생역정 전체를 기록한 ‘자서전’은 이 책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 문재인

노무현 대통령 정본 자서전 출간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1주기를 맞아 노무현재단과 돌베개가 함께 ‘노무현 사후 자서전’을 펴낸다. 고인이 남긴 저서, 미발표 원고, 메모, 편지 등과 각종 인터뷰 및 구술 기록을 토대로 출생부터 서거까지를 일목요연하게 시간순으로 정리한 책이다. ‘대북 송금’특검 사건 관련 배경 등 처음 공개되는 이야기들이 많고 또 무엇보다 어린 시절부터 서거 직전까지 삶 전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들에 대한 고인의 솔직한 심경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기록을 일관된 문체로 정리하는 작업은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맡았다. 노무현 대통령 안장식 직후 ‘봉하전례위원회’가 유족들의 동의를 받아 유시민 전 장관에게 자서전 정리 집필을 의뢰했기 때문이다. 유시민 전 장관은 2009년 8월부터 2010년 2월까지 꼬박 6개월 동안을 이 정리 작업에 매진했다. 고인의 모든 자필, 구술 기록물들을 살펴 일대기로 정리하고, 빈틈은 유족과 지인들의 인터뷰, 공식 기록 등을 통해 보완했다. 또 고인이 남긴 여러 기록들 중 퇴임 후 서거 직전의 미완성 회고록 노트를 기본으로 문체를 통일하는 작업도 거쳤다. 유족과 재단 관계자들, 그 밖에 가까이에서 고인을 지켜봐온 지인들의 검토를 통해 사실관계를 철저히 확인하여 오류 가능성을 최소한으로 줄이고자 하였다.
이 자서전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프롤로그는 자서전의 집필 시점(고인이 회고록 초안을 위해 메모를 시작하는 시점)인 서거 직전의 상황을 담고 있다. 1부 ‘출세’는 출생에서부터 부산상고에 입학해 공부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해 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2부 ‘꿈’은 부림사건을 맡은 이후 민주화운동에 헌신하게 된 이야기부터 정치에 입문해 민주당에서 대통령후보로 경선에 나서기 전까지의 이야기가 담긴다. 3부 ‘권력의 정상에서’는 2002년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승리하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부터 대통령 재임기간의 일을 담고 있다. 4부 ‘작별’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후 고향으로 내려가 새로운 꿈을 꾸고 실패한 후 서거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에필로그에서는 정리자인 유시민이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의 상황을 정리했고, 문재인 노무현재단 상임이사가 감사의 말을 썼다.
자서전은 두 종류의 판본으로 만들었다. 양장본은 특별히 부록 화보를 추가하고 독특한 케이스에 담아 고인의 생전 모습을 기억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뜻 깊은 선물이 될 수 있도록 했다. 반양장본은 더 편리하게 책을 활용하고자 하는 독자들을 위해 실용적으로 만들었다. 양장본과 반양장본 모두 본문에 올컬러 사진들을 담고 있다.

“변호사 노무현, 인권운동가 노무현, 정치인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은 모두 ‘인간 노무현’의 일부입니다. 그 모두가 하나로 어울려 ‘인간 노무현’이 되었습니다. ‘인간 노무현’의 삶과 죽음 전체를 있는 그대로 살펴보아야 비로소 ‘대통령 노무현’을 깊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다른 사람이 원고를 정리하기는 했지만, 이 책은 노무현 대통령 스스로 자신의 삶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 일들을 기록한 ‘정본 자서전’입니다.” ― 문재인

“2009년 5월 23일 아침 우리가 본 것은 ‘전직 대통령의 서거’가 아니라 ‘꿈 많았던 청년의 죽음’이었는지도 모른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우리 민주주의의 청춘이었다. 양김 분열과 3당합당, 정치인들의 기회주의와 시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거치며 모두가 중년으로 노년으로 늙어 가는 동안, 그는 홀로 그 뜨거웠던 6월의 기억과 사람 사는 세상의 꿈을 가슴에 품고 씩씩하게 살았다. 잃어버린 청춘의 꿈과 기억을 시민들의 마음속에 되살려 냈기에 그는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이던 시절에도 대통령을 마친 후에도 그는, 꿈을 안고 사는 청년이었다.” ― 유시민

책속으로 추가

_ 연애와 결혼

2년 동안 커피 한 잔 값 들이는 일 없이 맨입으로 연애를 했다. 밤이 이슥하도록 화포천 둑길을 함께 걸었다. 밤하늘에 쏟아질듯 은하수가 흐르는 여름날, 벼 이삭에 매달린 이슬에 달빛이 떨어지면 들판 가득 은구슬을 뿌린 것 같았다. 우리는 그 사이 논길을 따라 걷곤 했다. 아내는 그때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에 푹 빠져 있었다. 『안나 카레니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두꺼운 소설을 끼고 살았다. 동네에 둘이 사귄다고 소문이 났다. 우리 둘 말고는 처녀 총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소문이 나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돌아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게 행복한 시간이 아니었던가 싶다.
서로 사랑했지만 혼인은 순탄치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좋은 신랑감이 아니었다. 상고밖에 나오지 못한 시골뜨기가 고시 공부를 한답시고 책을 붙들고 있었으니 누가 보더라도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당시에는 60명만 뽑았기 때문에 서울법대를 나오고도 실패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장모님 보시기에 나는, 귀한 딸 밥 굶기기에 딱 좋은 남자였다. 그런데도 재주 있는 막내가 고시에 붙을 것이라고 믿은 형님들은 나중에 학벌 좋고 집안 좋은 부잣집 처녀한테 장가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미리 김치국을 마셨다. 어머니는 아내의 친정아버지 전력 때문에 고시 합격해도 판검사 임용이 안 된다고 걱정하셨다.
이렇게 되자 우리는 티격태격 싸움을 했다. 스스로 크게 출세할 거라고 믿었던 나는 무슨 큰 선심이나 쓰는 것처럼 행세했다. 아내는 아내대로 희생을 무릅쓰고 백수건달이 될지도 모를 남자를 받아들였는데 그걸 알아주지 않는다고 서운해했다. 매일 만났고 매일 다투었다. 그래도 우리는 물불 가리지 않고 서로 좋아했다. 결국 가족들도 우리를 인정해 주었다. 나와 권양숙은 1973년 1월 결혼식을 올렸다. 아들 건호와 딸 정연을 낳아 기르면서 36년 긴 세월을 함께 살았다. 처음 알게 된 때부터 계산하면 50년을 함께 한 셈이다. (61~62쪽)

_ 사법고시 합격
아내가 내 무릎에 얼굴을 묻고 눈물범벅이 되어 엉엉 울었다. 내가 사법고시에 합격한 것은 벌레가 사람이 된 것만큼이나 큰 사건이었다. 돼지를 잡고 풍물을 치면서, 일주일 넘도록 마을 잔치를 벌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기쁨을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진영 읍내 큰길에 가서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자랑하고 싶었다.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내게 물었다. 어떻게 혼자 공부해 고시에 합격할 수 있었느냐고.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쨌든 해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나도 아내도, 그 순간만큼 큰 성취감과 행복을 느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대통령이 되었을 때도 그때만은 못했다. (65쪽)

_ 판사 생활
대전지법에서 판사 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모범적인 법관도 아니었고 우수한 판사도 아니었다. 판사 업무는 매우 단조로웠다. 아침마다 서기가 책상 왼쪽 모서리에 기록을 올려두면 나는 그것을 검토하고 메모해 오른쪽 모서리로 옮겨 놓곤 했다. 언제나 그렇게 똑같은 하루가 흘렀다. 선배 판사들을 따라다니면서 변호사들한테 밥 대접 술 대접을 받았다. 선배들이 접대를 잘 하지 않는 변호사를 두고 짠돌이라고 욕하는 것을 듣고 그런 변호사들을 골탕 먹일 못된 궁리를 하기도 했다.
나는 이른바 생계형 범죄에 대해서는 무척 관대한 판사였다. 닭 서리를 하다 잡혀온 젊은이나 소액의 ‘촌지’를 받았다가 기소된 하급 공무원들에게는 무죄나 집행유예를 주려고 애썼다. 사연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도무지 남의 일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입견에 사로잡혀 구속영장 청구 서류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대충 영장을 발부한 일도 있었다. 판결을 내릴 때 법원 직원의 청탁 때문에 영향을 받은 적도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결국 1년도 다 채우지 못하고 판사를 그만두었다. 더 계속했더라도 훌륭한 판사가 되지는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67쪽)

_ 변호사 시절
그러나 큰 틀에서 보면 나는 적당히 돈을 밝히고 인생을 즐기는, 그저 그런 변호사였다.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이다. 사기 혐의로 남편이 구속된 아주머니에게 사건을 수임했다. 합의만 되면 변론도 필요 없는 사건이었다. 마침 사무실에 돈이 딱 떨어진 때라 합의를 종용하지도 않고 수임료 60만 원에 덜컥 사건을 맡고 얼른 접견을 다녀왔다. 다음날 합의를 본 의뢰인이 찾아와 수임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했다. 나는 변호사 수임 약정서를 보여주면서 이미 접견을 했기 때문에 수임료 반환을 청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실랑이 끝에 발길을 돌리면서 그 아주머니가 말했다. “변호사는 본래 그렇게 해서 먹고 삽니까?” 화살이 되어 가슴에 꽂힌 이 한마디는 수십 년 동안 내게 고통을 주었다. 지금도 귀에 들리는 것 같다. 나는 용서를 구하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를 얻지 못했다. (69쪽)

_ 부림 사건
머릿속이 마구 헝클어졌다. 사실과 법리를 따지기도 전에 걷잡을 수 없이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법정에서 냉정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변론을 하기가 어려웠다. 불법 구금과 고문으로 당사자와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처참한 고통을 거론하면서 공안기관의 불법 행위를 폭로하고 비판했다. 방청석은 울음바다가 되었고, 검사뿐만 아니라 판사도 표정이 일그러졌다. 법정 분위기가 험악했다. 다음날 보자고 해서 검사를 만났더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느냐고 나를 힐난하면서 협박했다. “부산에서 변호사 한두 명 죽었다고 그게 뭐 대단한 일이 될 줄 아시오?” 나는 오기가 나서 법정에서 검사와 삿대질을 해 가며 싸웠다. 그 사건 수사를 지휘했던 부장검사는 후일 국회의원이 되었다. (78쪽)

_ 인권 변호사: 민주화운동으로의 전환
그러나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무료 변론은 돈 좀 덜 벌면 그만이었지만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언제 어디로 끌려가 무슨 죄목을 뒤집어쓰고 쇠고랑을 찰지 모르는 위험한 일이었다. 조그만 농장이나 별장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자식을 외국 유학이라도 보내서, 공부를 다 하지 못했던 우리 부부의 한을 풀어 보자고 했던 꿈을 접어야 했다. 이렇게 양심과 욕망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나는 차근차근 주변을 정리했다. 요정과 룸살롱 같은 고급 술집에는 발길을 끊었다. 일본까지 가서 교육을 받을 정도로 열성이었던 요트 타기도 그만두었다.
내가 한동안 빠져 있었던 2인승 요트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크게 돈이 드는 스포츠가 아니었다. 집이 광안리 해수욕장 근처여서 부대 비용도 별로 들지 않았다. 돈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운동인 것도 아니었다. 거센 파도와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모래알 씹히는 불어터진 라면을 먹어 가면서 하는, 거친 남자들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드는 것은 곧 돈이 많이 드는 것이나 한가지여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승용차를 두고 버스로 출퇴근하면서 고급 일식집 대신 시장통 국밥을 먹었다. 돈을 아끼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민주화 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민중의 고통에 동참하는 삶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 사무실 사람들과 부산의 동지들은 다들 그렇게 살았다. (81쪽)

일손이 모자라서 부림사건 때 제일 오래 불법구금을 당했던 송병곤 씨를 직원으로 채용했다. 그는 이 인연으로 지금까지도 문재인 변호사가 몸담은 법무법인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정말 마음이 곱고 부지런한 사람이었고 모든 일을 책임감 있게 처리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월급 받으며 편하게 사는 것 자체를 몹시 괴로워했다. 그를 지켜보면서 당시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들 건호를 생각했다. 건호도 몇 년 지나면 대학에 갈 것이다. 그 아이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이 청년과 같은 길을 가라고 할 수 있을까? 모든 걸 못 본 체 하면서 어떻게든 출세하고 돈 많이 벌어 편하게 살라고 할 것인가? 양심이니 정의니 말은 쉬웠지만, 내 아들한테 고난의 삶을 권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고민해 본 끝에 내린 결론은 세상을 바로잡아야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아이들이 받을지 모르는 고통을 예방하는 길이었다. 아들한테 권하기보다는 아버지인 내가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82~83쪽)

산재 사건 증인으로 법정에 나온 노동자가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 너무 시끄러운 작업장에서 일한 탓에 난청이 된 것이다. 자기 자신도 산업재해 피해자이면서 그것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다른 사람의 산재 사건 증인으로 나온 노동자, 산재 사건 재판을 하면서 산재로 난청이 된 증인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고 짜증을 내는 판사와 변호사, 모두가 부조리극에 나온 배우 같았다. 나도 가해자의 한 사람인 것 같아서 참담한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일들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변호사로서 쉽게 돈을 버는 것이 죄 짓는 일처럼 느껴졌다.
거제도에서 어떤 노동자가 찾아왔다. 노동조합을 만들어 조합장이 되었는데, 보안대 거제 파견대장이 사무실로 불러 다짜고짜 정강이를 수없이 걷어찼다는 것이다. 바지를 올려보니 다리가 온통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그는 겁이 나서 회사에 사표를 냈다고 했다. 관할 마산지방노동청에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을 냈다. 그런데 또 맞을까 겁이 나 자기가 맞은 사실을 빼 달라고 사정했다. 나는 그를 설득해 그 부분을 기어코 집어넣었다. 그러자 마산 보안대 간부가 찾아와 거제 파견대장이 옷을 벗게 생겼으니 구제신청을 취하해 달라고 사정했다. 그 가족이 불쌍하지 않으냐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실직한 노동자의 가족이 겪는 고통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어떻게 협박하고 회유했는지 당사자까지 구제신청을 철회하겠다고 했다. 분통 터질 일이었다. 나는 끝까지 그 노동자를 붙들어 결국 복직을 시키고 조합장 자리도 되찾도록 했다. (87~88쪽)

_ 87년 대통령 선거와 진보 진영의 분열
1987년 12월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민주세력의 분열과 참혹한 패배로 끝났다.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던 민주진영은 김영삼 총재의 통일민주당과 김대중 총재의 평화민주당(평민당), 그리고 백기완 선생을 대통령후보로 내세운 진보정치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김종필 총재가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해 대통령 선거에 출전함으로써 보수세력도 분열되었다. 국민의 최대 관심사는 단연 ‘양김’의 후보단일화였으며, 이것이 대선 승패를 좌우하는 열쇠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두 지도자는 끝내 분열했다. 어디서나 마찬가지였지만 청년, 학생, 노동, 종교 등 여러 세력으로 구성되어 있던 부산의 재야 세력도 분열되었다. 부산 재야에는 김대중 후보에게 더 큰 정서적 정책적 연대감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당선 가능성만 두고 볼 때 김영삼 후보로 단일화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부산에서 우리끼리 토론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정치의 중심은 서울이었다. 바닥 모를 무력감을 느꼈다. 모두들 분열과 갈등을 두려워했다. 그래서인지 서로 조심해서 크게 다투지는 않았다. 그러나 끝까지 분열을 피할 수는 없었다.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는 ‘비판적 지지파’, 내심 김영삼 후보로 단일화하기를 원한 ‘후보단일화파’, 그리고 백기완 선생 지지파로 나뉘었다. 대통령 선거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같았다. 선거가 임박하자 6월 민주항쟁을 한 마음으로 치러냈던 사람들 사이에도 분열과 대립이 점차 심각해졌다. 양극단에 있는 일부 사람들이 서로 모략하는 일도 있었다. 공개적인 논의를 하지 않고 어디엔가 가담해 선거운동을 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그래도 부산 재야의 본류는 중립을 지켰다. 엄밀하게 말하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손을 놓고 있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94~95쪽)

_ 제도권 정치로
나는 좋은 남편도 아니었지만 좋은 아버지였던 것도 아니다.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후로는 아이들에게 시간을 쓰지 못했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아이들을 키웠는데, 정치를 하는 동안 집에서 아침 먹을 때 말고는 아이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 거의 없었다. 네 식구 모두 모이는 기회는 그때뿐이었다. 아내는 이 시간을 가장 귀하게 여겼다. 건호가 군에 갈 때 몇 번이나 약속을 하고서도 가족사진 찍을 시간을 내지 못해서 결국은 옛날 찍었던 사진을 가지고 갔다. 면회도 한 번밖에 가지 않았다. 보통 국민들이 돈 걱정 취직 걱정 덜 하고 억울한 일 당하지 않으면서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정치의 목적인데, 정작 정치를 하는 사람은 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정치에 무엇을 바쳤는지는 헤아릴 수가 없다. 바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말하기가 어렵다. 그런 것이 정치인의 삶이다. 아내가 정치 입문을 그토록 강력하게 반대했던 것은 이 모든 것들을 본능적으로 예측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결국 정치를 함으로써 아내와 아이들이 행복하게 사는 길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김영삼 총재의 영입 제안을 받아들였다. 개인적으로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소박하게 판단했다. “국회의원이 되면 노동자들을 돕는 데 유리할 것이다.” 민주화운동을 한 동지들과 이 문제를 놓고 진지하고 치열하게 토론했다. 처음에는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나중에는 대선 패배로 인한 6월 민주항쟁의 좌절을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통해 극복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이루었다. 더 진보적인 김대중 총재의 정책노선에 관심이 있다고 해도 부산에서 국회의원이 되려면 통일민주당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당선되기에 수월한 지역구를 고르라는 김영삼 총재의 호의를 사양했다. 아무 연고도 없는 부산 동구를 선택했다. 상대가 모두들 기피하던 전두환 정권의 실세 허삼수 씨였기에 거기에는 지원자가 없었다. 이왕이면 센 상대와 대결하고 싶기도 했고, 그가 전두환 대통령의 왼팔로 통한 5공화국 독재의 상징적 인물이기 때문에 민주화운동 세력을 대표해서 이기고 싶었다. 허삼수 선거캠프에는 주먹들이 많다는 소문이 돌았다. 선거운동원들이 심리적으로 위축된 것 같았다. 그래서 혼자 허삼수 후보 선거사무소를 찾아갔다. 가서 인사를 하고 정정당당하게 겨루어 보자고 말한 다음 아무 일없이 돌아왔다. 아무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서 그렇게 했다. (97~98쪽)

_ 원진레이온 사건
그런데 통일민주당에서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단아한 언행으로 국민의 신망을 받았던 평화민주당 박영숙 부총재와 함께 현장 조사를 나갔다. 우리는 회사를 추궁해 직업병임을 인정하고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합의서를 받아 냈다. 그러나 회사 측은 그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다시 회사를 찾아갔다. 거기서 휠체어에 앉은 사지마비 환자를 만났다. 어린 딸이 곁에 서 있었다. 그 사람은 안면 근육이 전부 마비되어 어떤 표정도 지을 수 없었다. 마치 가면을 쓴 것 같았다. 나는 그를 똑바로 보지 못했다. 견딜 수가 없어서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려 했다. 열서넛 먹어 보이는 딸이 내 차 유리에 매달려 울부짖었다. “우리 아빠 좀 살려 주세요!” 무심코 시선을 돌렸다. 그 아버지의 일그러지고 굳어 버린 뺨 위로 굵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내가 저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자괴감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1988년 7월 임시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을 하면서 참담한 노동 현실에 대한 분노를 있는 그대로 터뜨려 버렸다. “국무위원 여러분, 아직도 경제 발전을 위해서, 케이크를 더 크게 하기 위해서, 노동자의 희생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런 발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니네들 자식 데려다가 죽이란 말야! 춥고 배고프고 힘없는 노동자들 말고, 바로 당신들 자식 데려다가 현장에서 죽이면서 이 나라 경제를 발전시키란 말야!” 국회의원회관 사무실로 수없이 많은 격려 전화가 왔다. 그러나 당장 현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 (102~103쪽)

_ 5공비리특위 청문회
당에서 정주영 회장이 고령인 데다 업적이 많은 기업인이니 함부로 다루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다른 증인들한테는 고함을 치고 욕설까지 했던 의원들이 정주영 회장에게는 회장님 소리를 해 가며 예우를 했다. 문을 열어 주며 과잉 친절을 베푸는 의원도 있었다. 대한민국은 확실히 돈이 말하는 세상이었다. 하지만 국민들의 생각은 달랐다. 국민들은 일해재단 문제를 ‘강제 모금’이 아닌 ‘정경유착’으로 판단했다. 모금의 강제성만 따지면 재벌 회장들은 피해자가 된다. 그러나 뇌물을 바치고 사업의 특혜를 받는 정경유착이라면 전두환 정권과 재벌 회장들은 가해자 공범이 되고 국민이 피해자가 된다. 국민들은 법률과 상식을 짓밟으면서 권력을 휘두른 전두환 정권과, 그 권력에 야합하여 이권을 챙겨먹은 기업인 모두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으며, 국민 대표인 국회의원들이 이 분노를 대변해 주기를 기대했다. 나는 ‘정경유착’의 실상을 파헤치고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증인 심문을 했다. 정주영 회장이라고 해서 특별히 봐 주지 않았다. 온 국민이 보는 가운데 당당하게 “나는 시류에 따라 산다”고 말했던 정주영 회장이 마침내 말문이 막혔다. 결국 바른 말을 하는 용기를 가지지 못했던 것을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내가 청문회에서 돋보이게 되었던 것은 국민들과 눈높이가 맞았기 때문이었을 뿐, 특별한 기술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집과 의원회관 전화는 아예 불통이 되었다. 내 기사가 실리지 않는 신문 잡지가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정치인으로서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었다. 그런데 보도가 하나같이 입지전적 성공담으로 흘렀다. 집이 가난해 대학도 못 간 사람이 사법고시에 붙었고 국회의원이 되었고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는 식이었다. 불우한 사람을 만들어 내는 사회 구조를 변혁하고 노동자들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이 정치 활동의 목표라고, 내가 주로 하는 일이 그것이라고 누누이 강조를 했지만 기사에는 모조리 잘려나가고 없었다. (105~106쪽)

_ 국회의원직 사퇴
1989년 3월의 어느 봄날이었다. 가로수들이 화창한 봄볕 아래서 싱그럽게 어린잎을 피워 올렸고 하늘빛도 무척이나 고왔다. 오전 본회의를 마치고 국회 정문을 빠져나오다가 버스 정류장에 행색이 초라한 사람들이 우두커니 줄지어 서 있는 광경을 보았다. 수행비서가 상계동 철거민들인데 국회 앞에서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밀려났다고 했다. 플래카드를 둘둘 말아들고 맥 빠진 표정으로 서 있는 그 사람들 앞으로 국회의원들의 검은색 승용차가 줄지어 지나가고 있었다. 시트 깊숙이 몸을 묻고 고개를 숙였다. 그들과 눈이 마주칠까 두려웠다. 슬픔이 어깨를 짓눌렀다.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이런 사람들이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막는 국회에 몸담고 있는 것이 부끄러웠다. 내가 하는 일이 혹시 정의롭지 못한 권력을 위한 구색 맞추기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대답할 말이 없었다. 돌아오는 것은 양심의 쓰라림뿐이었다. 문득 떠나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109~110쪽)

_ 3당합당 반대
이해찬, 이상수, 김정길, 이철 의원과 함께 마포에 비밀 사무실을 얻었다. 모임 이름을 ‘정치발전연구회’로 지었다. 우리는 각자 소속 정당 안에서 야권통합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한 채 3당합당이라는 충격적 사건을 맞았다. 김영삼, 노태우, 김종필 세 사람이 상식을 뛰어넘어 세 정당의 합당을 전격 선언한 것이다. 1990년 1월 국회 개헌선을 확보한 거대여당 민자당이 출범했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통일민주당의 합당결의 대회장에서 주먹을 쥐고 외쳤다. “이견 있습니다. 반대 토론을 합시다.”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정당 내부에 민주적 절차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보스가 결정하면 무엇이든 모두 우르르 따라갔다.
3당합당은 두 가지 충격을 주었다. 첫째, 호남이 정치적으로 고립되었고 영남은 보수 정치세력의 손아귀에 완전히 들어가고 말았다. 이것은 우리 정치사에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지역구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고착화되었다. 둘째, 우리 정치를 통째로 기회주의 문화에 빠뜨렸다. 철새 정치의 수준이 달라진 것이다. 정치적 야심을 가진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려고 당을 옮겨 다니는 일은 그 전에도 있었다. 그렇지만 정권을 놓고 자웅을 겨루던 정치 지도자가 그런 일을 한 적은 없었다. 3당합당으로 인해 한국정치는 적나라한 기회주의 문화에 휩쓸려 들어갔다. 소신도 원칙도 없이 국회의원 당선이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떼를 지어 보따리를 싸들고 이 당 저 당 돌아다니는 것이 별로 부끄러운 일이 아니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20년 동안 나는 쉼 없이 싸웠다. 지역 분열주의에 맞섰고 기회주의에 대항했다. 내가 대통령에 출마하면서 내세웠던 구호 ‘원칙과 통합’은 이 기나긴 싸움의 핵심을 표현한 것이었다. 3당합당은 국가적 분열이자 민주 세력의 분열이었기에, 분열에 가담할 수 없어서 통일민주당을 탈당했다. 그러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우선 노동 현장에 다니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영남과 서울에서 옛 통일민주당 세력을 되살리기 위해 사람을 만나고 다니는 것이 전부였다. 청문회에서 얻은 명성이 큰 도움이 되었다. 국회 활동도 뒤로 밀어 버렸다. 민자당이 국회만 열면 날치기를 하니 국회에서는 할 일도 없었다. 전국을 다니면서 지구당을 창당했다. 사람들을 모아 단합대회를 열었다.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든 것이다. (115~116쪽)

_ 14대 총선 낙선
4년 전 김영삼 총재를 ‘대통령병 환자’라고 비난했던 허삼수 후보가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 김영삼 총재님을 모시고 부산 발전을 위해 이 몸을 바치겠다”고 했다. 4년 전 그를 ‘반란군 총잡이’로 규정하고 “국회가 아니라 감옥으로 보내야 한다”고 말했던 민자당 김영삼 총재는 지원유세에서 이렇게 말했다. “허삼수 씨는 충직한 군인입니다. 뽑아 주시면 중히 쓰겠습니다. 저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시려면 허삼수 씨를 국회의원으로 뽑아 주십시오.” 뽕밭이 변해서 바다가 되었다. 나에게는 김영삼 총재를 이길 만한 힘이 없었다. 그래서 국회의원 자리를 잃었다. (123쪽)

_ 김영삼 대통령
김영삼 대통령을 ‘훌륭한 정치 지도자’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조직의 탁월한 보스’였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의원직 사퇴서를 내고 도망갔을 때, 어쩌다 보니 전화 통화를 하게 되었다. 긴 말 할 것 없이 일단 만나자고 했다. 상도동으로 갔더니 김영삼 총재가 손님들을 다 내보냈다. 그가 뭐라고 하든 단호한 사퇴 의사를 밝히려고 마음먹었지만 바늘방석에 앉은 심정이었다. 그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뜻밖에도 당신 마음을 다 이해한다며 나를 위로했다. 노 의원 같은 사람이 견디기에 정치판이 너무 험하다고 했다. 어디 가서 낚시라도 하라며 200만 원이 든 봉투를 쥐어 주었다. 사퇴 철회 문제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진심으로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어 부하로 만드는 데 천재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126쪽)

_ 당 최고의원 당선
1993년 3월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김대중 총재가 없는 첫 전당대회였다. 이기택 씨가 당 대표에 출마했다. 나는 최고위원 선거에 출마했다. 대의원 한 명이 네 사람씩 찍는 선거였는데 나는 정치적 입지가 없었다. 통합 협상과 국회의원 공천 과정에서 유별나고 거칠게 싸웠기 때문에 당 주류인 동교동계의 지원은 기대할 수 없었다. 이기택 대표 쪽에도 내가 낄 자리는 없었다. 독자적으로 해보려 했지만 돈과 조직이 없어 어려웠다. 할 수 없이 곁불을 쬐며 선거운동을 했다.
이기택 대표가 사람들을 모아 밥을 먹는 자리에 끼어 밥을 얻어먹었다. 이기택 대표와 김정길 의원의 연설이 끝나고 나면 슬그머니 일어서서 나도 연설을 했다. 그때마다 김정길 의원이 나를 소개해 주었다. “품안의 자식만 귀한 게 아닙니다. 새어머니 등쌀에 구박을 받고 나가서 얻어먹고 다녀도, 나중에 효도하는 수가 있습니다.” 나는 동정표를 많이 얻어서 5등으로 당선되었다. 동교동계와 이기택계가 손잡고 최고위원 후보 세 명을 밀었다. 김정길 의원이 1등을 한다는 소문이 났다. 영남 쪽에 한 표를 줘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던 호남 대의원들이 노무현 불쌍하다고 표를 너무 많이 주었던 모양이다. 그 바람에 김정길 의원이 떨어져 버렸다. 미안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김정길 의원은 그래도 나를 원망하지 않고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는 고마운 평생 동지였다. (128쪽)

_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정보화도 중요한 관심사였다. 컴퓨터에 재미를 붙였다. 연구소에 많은 자료가 쌓이고 있었다. 10명의 연구원들이 한 달에 한 차례 이상 세미나를 했다. 발표와 토론 자료뿐만 아니라 회원들의 개인 정보와 전문가들이 만든 참고 자료, 수입과 지출 관련 정보들이 축적되었다. 그런데 이 정보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인명 자료는 주소와 전화번호 변경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각자 하는 일에 대한 보고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내부 소통도 원활하지 않았다. 유용한 정보를 일상적으로 업데이트하고 누구나 손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온라인으로 그런 시스템을 돌리는 소프트웨어를 만들기로 했다.
처음에는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해 150만 원 예산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이것이 굴러가면서 눈덩이처럼 커졌다. 비용이 700만 원으로 늘어나더니 급기야 6,000만 원짜리 프로젝트가 되었다. 나중에는 그것도 다 걷어치우고 2억 원을 개발비로 투입해서 ‘노하우’라는 업무표준화 프로그램을 완성했다. 이 프로그램을 대통령후보 때 사용했으며, 대통령이 된 후에는 ‘e-지원’이라는 청와대 업무관리 시스템으로 발전시켰다. 특허도 받았고 임기 말에는 중앙정부 행정부처에도 확산시켰다.
‘노하우’를 개발하면서 데이터베이스를 공부했고 컴퓨터 프로그램의 종류와 원리를 익혔다. 정치 활동과 연구소의 업무 전반에 대해 직접 직무분석을 했다. 정보 축적과 재활용 시스템을 만드는 프로그램 기획안도 내 손으로 직접 썼다. 내가 원하는 시스템 전체의 구조와 요구 사항들을 종이에 일일이 적었다. 두툼한 바인더로 10권이나 되는 주문서를 만들었다. A4지로 300쪽 정도 분량이었다. 그 다음에는 서류도 없이 받아 적게 하면서 다섯 시간에 걸쳐 설명했더니 프로그래머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프로그램을 다시 만들어 오면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다 확인했더니, 이 사람들이 나를 만나는 것 자체에 겁을 먹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일정, 인명 정보, 자료와 회계를 전부 통합했다. 인명 데이터베이스를 기초로 수천, 수만 개의 명부를 생산하고 축적하는 틀을 만들었다. 하지만 상품화해서 투자비를 회수하는 데는 실패했다. 업무 분석과 표준화가 지나치게 세밀해서 상품화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나는 이 일을 하면서 지식공유 시스템의 기본 개념을 알게 되었다. (131~132쪽)

_ 기회주의와의 싸움
김영삼 대통령과 이회창 씨는 원래 서로가 서로를 용납할 수 없는 관계였다. 이회창 씨는 대쪽이라는 이미지로 김영삼 대통령의 초법적 국정운영에 반기를 들어 인기를 얻었던 사람이다. 그런 두 사람이 절묘하게 타협을 한 것이다. 그 두 사람으로 하여금 손을 잡게 만들었던 것은 대구와 충청도의 이반이었다. 지역주의에 기반을 둔 정치를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 조선 건국 이래 600년 역사에서 한 번도 제대로 된 정권교체가 없었다. 권력의 편에 서야만 비로소 권력을 이어받을 수 있었던 역사였다. 권력에 맞섰던 사람 가운데 패가망신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자손들의 앞길까지도 막아 버렸다. 적어도 무사하게 밥이라도 먹고 살려면 권력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시비를 가리지 말고 납작 엎드려 살아야 했던 기회주의 역사가 무려 600년이었다. 결국 이회창 씨도 조순 씨도 권력에 줄을 서야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쪽으로 간 것이 아닌가.
나는 이런 역사를 마감하고 양심과 신념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세상을 만들려면 정권교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140~141쪽)

_ 1998년 종로구 국회의원 당선
서울시장 꿈을 버리지 못했다. 당에서는 한광옥 씨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당내경선 후보로 등록하고 김대중 대통령을 찾아가 여론조사 결과를 드렸다. 한광옥 씨는 한나라당 최병렬 후보를 이기지 못하지만 나는 이기는 조사 결과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서울시장보다 종로지구당을 맡으라고 권했다. 며칠 후 이강래 정무수석이 찾아와 고건 씨를 후보로 하는 것이 대통령 뜻이라고 했다. 그가 ‘성공시대’라는 텔레비전 프로에 출연한 후로 지지율이 솟구쳤다는 것이다. 나는 이 결정에 승복하고 종로지구당을 맡았다.
매몰차게 공격했던 과거사 때문에 무척 민망했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조직을 인수받았다. 장차 종로에 복귀할 생각이 있어서 조직을 잘 넘겨 주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이종찬 부총재는 옛날 일을 하나도 따지지 않고 성의껏 조직을 인계하고 당원들을 설득해 주었다. 덕분에 별다른 애로사항 없이 보궐선거를 잘 치러 낼 수 있었다. 이광재, 안희정, 백원우 등 젊은 참모들이 모두 종로에 와서 조직을 인수하고 선거운동 준비를 했다. 1998년 7월 21일, 다시 국회의원이 되었다. 국회의원 선거 두 번, 부산시장 선거 한 번, 모두 세 번 낙선한 끝에 맛본 10년 만의 승리였다. 이 선거를 치르면서, 그동안 너무 내 논리만 가지고 까다롭게 정치를 해 온 것을 반성했다. 이종찬 씨에 대해서 늘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살았다. (149쪽)

제16대 총선을 부산에서 출마하겠다는 기자회견을 했다. 1999년 2월 9일, 종로구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지 반 년, 총선을 1년 2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지역 분열을 더 부추겨서는 안 됩니다. 동서통합을 위해서 부산 경남 지역으로 갑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내심 ‘이익을 위한 정치’와는 다른 ‘희생의 정치’로 받아들여지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언론보도는 내 희망과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이종찬 씨에게 지역구를 돌려주기로 밀약”, “당내 세력 다툼에서 밀려난 것”, “여당 지도부의 동진 정책 전략의 일환”이라는 등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그나마 “대권을 향한 노무현의 승부수”라는 기사가 제일 잘 써 준 것이었다. 안타까움을 넘어 좌절감을 느꼈다. 이종찬 씨는 종로 지역구를 되찾으려 하지 않았다. 나도 미리 그와 상의하지 않았다. 선거를 1년 넘게 앞두고 발표한 것은 순전히 한나라당의 영남권 집회 때문이었다. 어차피 부산으로 가기로 마음먹은 것,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에게 하루라도 빨리 경고를 하고 싶어서 그 시점을 택했던 것이다.
종로구청 강당에 지구당 당직자와 지역 유지들이 모였다. 참으로 미안한 자리였다. 종로에 국회의원다운 국회의원이 왔다고 좋아한 당원이 많았다. 그런데 6개월도 지나지 않아서 부산으로 간다고 선언을 했으니 얼마나 큰 배신감을 느꼈을까? 나도 슬펐다. 종로는 너무나 좋은 곳이었다. 동네 생김새가 그림 같았다. 롯데호텔에서 바라보는 청와대의 모습도 좋았고, 곳곳에 체육공원과 약수터가 있어서 건강 관리와 선거운동을 동시에 할 수 있었다. 마지막 당직 인선을 발표한 다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말 미안하다고,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라 하는 것이지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라고 간곡하게 용서를 청했다. 반쪽 정권을 극복하려면 여당이 꼭 전국정당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분위기가 숙연해지더니 마지막에 가서는 사람들이 전부 박수를 쳤다. 왈칵 눈물이 났다. 찔끔이 아니고 펑펑 쏟아졌다. 왜 그리 울었는지 모르겠다. (151~152쪽)

_ 노사모
노사모는 좌절감에 빠졌던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내가 도와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시민들 스스로 노무현을 지지하는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면서 조금도 생색을 내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의 성원을 받는 것은 행복한 특권이었다. 2001년 5월 기자간담회에서 차기 대통령 선거에 나갈 뜻을 밝혔을 때 내가 마음으로 기댄 것은 바로 노사모의 성원이었다. 걱정이 없지는 않았다. 팬클럽 수준을 넘어 전업을 하다시피 뛰어든 청년들이 있었다. 몇 달씩 휴직하거나 고시공부를 중단하고 자원봉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는 선거를 돕기 위해 사표를 내고 선거가 끝난 다음 다른 직장을 구한 사람까지 있었다. 모두 남의 자식들이라 무척 신경이 쓰였다. (165쪽)

노사모는 민주당 국민경선 승리의 주역이었고, 대선 승리의 견인차가 되었다. 대통령을 하면서 국민들의 신임을 잃었을 때도 변함없이 나를 지켜 주었다. 봉하마을 생태농업과 숲 가꾸기, 장군차 심기와 화포천 청소를 할 때는 자원봉사자로 함께 했다. 심지어는 나의 잘못과 흠결이 드러났을 때에도 나를 버리지 않았다. 노사모는 내가 검찰에 소환되어 봉하 집을 나설 때 버스 앞에 노란 국화 꽃잎을 뿌려 주었다. 피의자로 조사를 받은 그 긴 시간 내내 검찰청사 앞에서 노란풍선을 들고 기다려 주었다. 노무현을 버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지만, 끝내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들은 내 말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말하고 행동했다. 그것이 노사모였다. (167쪽)

_ 2002년 대통령선거 민주당 후보 경선
후보는 일곱이었다. 이인제, 김근태, 정동영, 한화갑, 김중권, 유종근, 노무현. 내 캠프가 제일 초라했다. 경선 캠프에 국회의원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으며 후보인 나도 국회의원이 아니었다. 당원 조직도 취약했고 돈도 없었다. 노사모와 부산상고 동문회가 있었지만 모두 비정치적인 조직이었다. 그러나 노사모는 일당백의 활약을 했다. 노사모는 수십만 명의 선거인단 참여 신청서를 모았으며 선거인단으로 뽑힌 사람들을 찾아가 투표 참여를 부탁했다. 영남 노사모는 호남 선거인단에게, 호남 노사모는 영남 선거인단에게 눈물겨운 호소를 담은 편지를 직접 손으로 써서 보냈다. 문성근, 명계남 씨와 같은 유명인사들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선거인단을 한 사람씩 방문해 무릎을 땅에 대고 노무현을 도와달라며 눈물로 호소했다. 내가 후보가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도 확신하지는 못했다.
2002년 3월 9일 토요일, 제주도에서 첫 경선을 했다. 여론조사에서 절대강자는 없었고 실제 득표도 그러했다. 조직력이 강했던 한화갑 후보가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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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정보

고맙습니다
노무현 자서전,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프롤로그: 실패와 좌절의 회고록

제1부 출세
1. 유년의 기억 2. 은인 김지태 선생 3. 내 인생의 부산상고 4. 막노동판에서
5. 권양숙을 만나다 6. 사법고시 합격 7. 세속의 변호사

제2부 꿈
1. 부림사건 2. 운동 전문 변호사 3. 사람 사는 세상 4. 분열과 좌절 5. 국회의원이 되다 6. 청문회 스타 7. 의원직 사퇴 8. 김영삼과 결별하다 9. 『조선일보』와 싸우다
10. 첫번째 낙선 11. 야권통합 12. 지방자치실무연구소 13. 두번째 낙선
14. 세번째 낙선 15. 정권교체의 감격 16. 다시 국회로 17. 종로를 떠나다
18. 자동차 산업 살리기 19. 네번째 낙선, 노사모의 탄생 20. 해양수산부 장관

제3부 권력의 정상에서
1. 『조선일보』 인터뷰를 거부하다 2. 광주의 기적 3. 김대중 대통령과 나 4. 후보단일화
5. 단일화 파기의 우여곡절 6. 대통령 당선 7. 구시대의 막차 8.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거짓말 9. 양극화 10. 부동산 정책 11. 방폐장과 세종시 12. 대북송금특검법
13. 탄핵 14. 이라크 파병 15. 남북관계의 핵심은 신뢰 16. 한미 자유무역협정
17. 남북정상회담 18. 국정원장 독대보고 19. 검찰 개혁의 실패
20. 정치 권력과 언론 권력 21. 대연정 제안 22. 원칙 잃은 패배 23. 청와대를 떠나다


1. 귀향 2. 봉하오리쌀 3. 화포천, 둠벙, 무논 4. 장군차 5. 국가기록물 사건
6. 수렁에 빠지다 7. 노무현의 실패는 노무현의 것이다 8. 마지막으로 본 세상

에필로그: 청년의 죽음

자료
연보
화보(양장판 수록)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