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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중국 현대사
인물로 읽는 중국 현대사
저자 : 신동준
출판사 : 인간사랑
출판년 : 2011
ISBN : 9788974180478

책소개

'중화민국 시대' 이래 21세기 'G2' 시기에 이르기까지 중국을 이끌어온 개개 인물의 면면을 면밀히 추적한 책으로, 2010년에 출간된 <인물로 보는 중국근대사>의 자매편에 해당한다. 군벌의 각축을 비롯해 장개석과 모택동, 주은래, 등소평 등의 생장과정과 리더십을 추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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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현재 동양3국의 학계 내에서 근대의 시점始點에 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는 상황이다. 중국은 대영제국과 처음으로 맞붙은 1840년의 제1차 아편전쟁, 일본은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1853년의 흑선黑船 내항, 한국은 일본에 의해 강압적으로 맺게 된 1876년의 강화도조약을 근대의 시점으로 보고 있다. 약간의 이견이 있기는 하나 동아3국을 휩쓴 서구 열강의 충격에 시간적 차이가 있었다는 점에서 대략 역사적 흐름과 맞아떨어지고 있다. 문제는 현대의 시점이다. 일본의 경우는 야스마루 요시오安丸良夫가 {현대일본사상론}에서 역설했듯이 대략 1945년의 패전을 시점으로 잡고 있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기는 하나 이 경우 제1-2차 세계대전이 빚어지는 20세기 전반의 시기를 ‘근대’로 간주하는 셈이 돼 다분히 자의적인 기준이라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심기일전해 오늘의 부국을 이뤘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찾기 힘들다.

중국의 대다수 학자는 현대의 시점을 1919년에 일어난 5.4운동으로 잡고 있다. 이에 반해 대만을 중심으로 한 일부 학자는 청조 붕괴의 결정적인 배경이 된 1911년의 신해혁명으로 그 시기를 소급시키고 있다. 결론부터 말해 양자 모두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져 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신해혁명은 발발 당시 엄연히 청조가 존재하고 있었던 까닭에 일종의 군변軍變에 지나지 않았다. 청조가 아무리 피폐한 상황이었다고는 하나 당시 황제는 천하에 명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실체였다. 청조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 부의가 퇴위를 선언하고 이어 원세개가 ‘중화민국’의 초대 총통으로 취임하는 1912년을 현대의 시점으로 삼는 게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 현대의 시점을 1919년의 5·4운동으로 잡는 것은 중국의 역사를 오직 한족만의 역사로 간주하는 편협한 종족주의 시각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중국의 역사는 남방의 한족 이외에도 몽골족 및 만주족을 포함한 북방의 이민족이 함께 엮어나간 다민족의 역사에 해당한다. 이는 중국의 역대 왕조를 개괄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원래 5·4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파리에서 열린 강화회의에서 패전국 독일의 중국 산동 지역에 대한 권익을 일본에 양도한다는 결정을 내린데서 촉발된 반제反帝운동이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현혹된 나머지 일제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형식으로 전개된 조선의 3.1운동과 닮아 있다. 당시 5.4운동이 중국인을 각성시켜 단결케 만드는 계기로 작용한 것은 사실이나 이것이 중국의 근현대를 구분 짓는 잣대로 작용한 건 아니다. 실제로 당시 원세개의 후신인 북양군벌이 ‘중화민국’을 대표하는 북경정부로 존재하고 있었고, 북경정부가 5.4운동으로 인해 무슨 타격을 입은 것도 아니다. 주관적으로는 5.4운동을 얼마든지 높게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시대구분과 같은 객관적인 평가 작업에서는 보다 냉정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사상사를 개관하면 주관적인 시대구분을 자행한 적이 몇 번 있었다. 전한제국의 유생들이 ‘분서갱유’를 자행한 진시황의 치세 자체를 인정치 않고, 주왕조가 전한제국으로 직접 이행했다고 주장하는 게 첫 번째 사례에 해당한다. 사상 최초의 통일제국인 진제국이 엄연히 존재했음에도 이를 인정치 않으려 한 것은 역사를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냉정한 사가의 입장과 동떨어진 것이다. 삼국시대가 끝난 후 서진제국의 유생들이 1백년에 걸친 삼국시대의 존재 자체를 아예 무시한 채 후한제국에서 곧바로 서진제국으로 이어졌다는 식의 논리를 전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남송대의 주희가 조조의 위나라정권을 극도로 타기한 나머지 {통감강목}에서 촉한의 연호를 정통으로 인정한 것도 감정을 앞세워 역사를 논단했다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이런 자세로는 결코 역사에서 배울 게 없게 된다.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자고자대自高自大하는 것은 패망의 길이다. 청조가 전래의 ‘중화질서’에 함몰된 나머지 막강한 화력으로 무장한 서구 열강을 끝내 우습게 여기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게 그 증거다.

중국의 학자들이 북양군벌로 이뤄진 북경정부를 봉건정권으로 매도하면서 5.4운동을 계기로 중국이 현대의 문턱을 넘었다는 식의 억지 주장을 펴는 것도 과거 주희 등이 행한 ‘자고자대’ 행보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성리학의 잣대 대신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을 들이댄 것만이 약간 다를 뿐이다. 실제로 현재 많은 중국학자들은 원세개를 도도한 역사전개 과정에 불쑥 튀어나온 돌연변이와 같은 인물로 간주하고 있다. 아무리 학술 논문의 외투를 걸치고 있을지라도 이는 원세개과 그 후계자들이 장악한 북경정부를 인정치 않으려는 감정적인 판단이 앞선 결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념이든 감정이든 역사적 사실을 무시한 채 주관적인 평가 잣대를 들이대 역사를 억지로 재단하고 꿰어 맞추는 것은 일종의 역사왜곡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가 위대한 것은 선인들이 걸어간 길을 통해 현재를 되짚어보는 거울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거울이 본연의 기능을 하려면 있는 그대로 사물을 비춰야만 한다. 왜곡된 시각에서 출발한 역사평가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 이른바 예사穢史가 그것이다. 현대에 들어와 김일성 부자를 극도로 미화한 북한의 {조선혁명사} 등도 ‘예사’의 대표적 실례에 해당한다. 고금을 막론하고 역사를 해석하고 평가하는 자세는 어디까지나 있는 사실을 하나의 ‘팩트’로 인정하는 가운데 출발하는 냉정한 자세가 필요하다. 중국의 현대는 원세개가 ‘중화민국’의 초대 총통으로 취임하는 1912년으로 잡는 게 사리에 부합한다.





‘신 중화제국’



중국의 역사를 개관하면 왕조교체기 과정에서 하나의 패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모택동이 초석을 깐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과정 역시 기왕의 이런 패턴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있다. 역사상 왕조교체기의 패턴을 최초로 언급한 사람은 삼국시대 초기 위나라에서 활약한 중장통仲長統이다. 그의 저서 {창언昌言}은 현재 대부분이 없어지고 한두 편만이 전해지고 있다. 그가 언급한 내용의 골자는 대략 다음과 같다.

“천명을 받은 호걸은 처음부터 천하의 명분을 갖고 시작하는 게 아니다. 천하의 명분이 없으니 자연히 천하를 취하려는 인물이 분분히 일어나게 된다. 이로 인해 지혜를 다투는 자가 지혜를 다하여 궁해지고 힘을 다투는 자가 힘을 다해 실패하게 되면 그 형세가 더 이상 대적할 수 없고 그 역량이 더 이상 비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때는 설령 수천 명의 주공周公과 공자가 있을지라도 새 왕조의 제왕과 성덕을 겨룰 길이 없게 된다. 그러나 보위를 이은 어리석은 군주들은 천하에 감히 자신과 대항할 것이 없는 것으로 생각해 스스로 자신의 보위와 천지는 영원히 망하지 않을 것으로 착각한다. 이에 멋대로 방종하고 욕심을 끝없이 키우게 된다. 군신이 공개적으로 음락淫樂을 즐기고 함께 해악을 행하여 조정을 황폐하게 하니 인재를 잃거나 잊게 된다. 드디어 천하의 고혈을 모두 태워버리고 만민의 골수까지 빼내게 되니 원성이 길에 들끓고 백성이 편히 살 수 없게 된다. 이에 재난과 전란이 어지러이 동시에 일어나 중국이 시끄러워진다. 사방의 오랑캐가 배반하여 분분히 침략하여 조정이 붕괴되고 대세가 순식간에 기울어져 전에 내가 먹여 기른 자손들이 지금은 모두 나의 피를 빨아먹는 원수가 된다. 이때가 되면 이미 시운이 바뀌고 대세가 이미 무너진 것이다. 그럼에도 이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부귀가 불인不仁을 낳는 걸 몰랐다기보다는 크게 취해 우매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누대의 존망存亡이 이로써 부단히 다시 바뀌게 되고 천하의 치란治亂은 이로써 다시 돌기 시작한다. 이는 천도天道가 늘 그러한 이치이기도 하다.”

중장통의 ‘왕조순환설’은 동양 전래의 ‘역사순환설’ 중 가장 정치精緻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국의 동양학자 라이샤워도 지난 1960년대에 중장통과 유사한 이론을 전개한 바 있다. 라이샤워와 중장통의 이론을 중국의 전 역사에 대입할 경우 예외 없이 들어맞는 걸 알 수 있다.

유방이 진시황 사후 진제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귀족 출신인 항우를 제압함으로써 최초의 농민출신 황제가 되고, 조조와 유비 등의 천하를 3분하는 삼국시대를 이끌어내고, 3백년간에 걸친 남북조시대를 종식시킨 수나라가 무리한 고구려정벌로 내분이 일어난 것을 이용해 이연과 이세민이 당제국을 건립하고, 조광윤이 5대10국의 혼란기를 수습해 북송을 세우고, 주원장이 비밀결사인 백련교도에서 몸을 일으켜 농민반란군의 수장이 된 후 북경으로 진격해 명제국을 일으키고, 만주족이 명나라 장수의 투항을 계기로 북경에 입성해 청조를 세우는 과정 등이 이 패턴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있다.

원세개의 북경정부가 발족한 1912년부터 모택동이 천안문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한 1949년까지의 과정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청조의 패망 이후 30여 년간에 걸친 내전 끝에 건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은 청조의 뒤를 이은 또 하나의 왕조에 해당한다. 본서가 중화인민공화국의 건립을 ‘신 중화제국’으로 간주한 이유다. 제왕정이 공화정으로 바뀐 것은 커다란 변화이기는 하나 거시사의 관점에서 볼 때 이는 하나의 변법變法에 불과할 뿐이다. 역사문화 전통은 결코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과거 로마노프 왕조 치하의 러시아와 스탈린 치하의 소련 및 현재 푸틴 체제 하의 러시아 사이에 ‘차리즘’의 차이를 거의 찾기 힘들다. 중국도 역대 왕조의 황제와 ‘중화제국’의 황제에 해당하는 모택동 및 등소평 사이에 황제가 누리는 권력 및 권위 등에서 별반 차이가 없다. 한국의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이들을 두고 서구의 학자들은 ‘선출된 차르’와 ‘새로운 황제’, ‘선출된 왕’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창업과 수성



역대 황제의 리더십을 평가할 때 매우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잣대가 있다. 바로 ‘왕조순환설’에 입각한 치부致富와 균부均富의 틀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치부’와 ‘균부’의 중요성을 두루 언급한 바 있다. 치평治平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백성의 ‘치부’가 전제되어야 하고, 치평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백성의 ‘균부’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론적으로 볼 때 양자는 아무 모순이 없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이는 라이샤워가 지적했듯이 자만심과 나태에 빠진 권귀權貴들이 백성의 ‘치부’와 ‘균부’를 소홀히 하고, 탐욕에 빠져 의도적으로 그 균형을 깨뜨린 결과였다.

‘치부’와 ‘균부’의 분석틀은 중국 전래의 ‘왕조순환설’을 명쾌히 해석해 주고 있다. 원래 국고 증대의 원천인 백성의 ‘치부’는 춘추전국시대부터 국가의 생산력 증대를 위해 적극 권장된 전통이었다. 전국시대 초기 일부 국가는 법가사상가의 주장을 좇아 백성의 ‘치부’가 나태를 불러올까 우려해 의도적으로 막대한 세금을 물려 ‘치부’를 일정수준에서 묶은 경우가 있기는 하나 이는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치부’의 전통은 백성들로 하여금 더 열심히 노력해 더 많은 토지를 경작토록 부추겼다. 이 과정에서 남는 땅에 임금 노동자나 소작인을 사용하거나 고리대를 악용해 재산증식을 꾀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전국시대 말기에 맹자가 토지균배를 전제로 한 정전제井田制를 역설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부작용은 늘 무시됐다. 중국의 농촌사회가 거듭된 왕조교체에도 불구하고 수천 년간에 걸쳐 크게 대소 지주와 소작인으로 양분되는 구조로 고착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는 만성적으로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를 초래하는 근본배경으로 작용했다. 역대 왕조가 창업 초기에 예외 없이 일련의 ‘균부’ 정책을 실시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빈부의 양극화현상이 표면화하고 홍수와 한발 등이 겹치면 최하층인 소농 및 소작인들은 살 길을 찾아 사방을 떠돌다가 이내 유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는 농민반란으로 이어져 마침내 천하동란을 초래케 된다. 이런 악순환은 춘추전국시대부터 20세기 초의 국공내전 기간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졌다. 펄벅은 {대지}에서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해 노벨문학상을 탄 바 있다. 이런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토지제도의 전면 개혁이다. 일찍이 전한제국 말기에 왕망은 ‘신新나라’를 세운 후 이를 실행에 옮긴 바 있다. 바로 왕전제王田制가 그것이다. 이는 전국의 땅을 모두 국유화한 뒤 백성들에게는 경작권만을 나눠주는 제도로 맹자가 역설한 ‘정전제’의 이상을 구체화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국 실패해 신나라 패망을 앞당기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균부’에 지나치게 주목한 나머지 ‘치부’를 무시한 후과였다. 이후 이를 실시한 왕조는 없었다. 그러던 것이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이후 왕전제가 재차 등장했다. ‘균부’ 전통의 제도화를 겨냥한 소위 인민공사人民公社의 등장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균부’와 정반대되는 전 인민의 균빈均貧만 초래했을 뿐이다. ‘치부’의 전통을 무시한 후과였다.

다른 하나는 ‘치부’를 권장하면서도 갖기 못한 자들의 불만과 ‘균부’ 욕구를 충족키 위해 위정자가 적극 나서 일련의 ‘균부’ 정책을 시행하는 길이다. 등소평의 개혁개방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이는 왕조교체의 배경으로 작동하는 ‘치부’와 ‘균부’의 길항拮抗관계를 통찰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의 개혁개방이 성공한 배경이 여기에 있다. 중국 전래의 역사문화 전통 속에서 그 해법을 찾은 게 요체였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와 초고속성장의 부산물인 빈부의 양극화가 커다란 사회문제로 제기되면서 다시 ‘균부’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치부’와 ‘균부의 상호작용에 의한 왕조순환의 이치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과정은 물론 그 이후의 통치과정에서도 예외 없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셈이다.





G2와 한반도



중국의 전 역사를 통틀어 한반도가 중원에 직접적인 위협 대상으로 떠오른 적이 크게 세 번 있었다. 조선조 중엽에 터져 나온 왜란 및 호란, 1890년대의 청일전쟁, 1950년대의 한국전쟁이 그것이다. 왜란 당시 명나라 조정은 초기에 조선이 왜군과 합세해 만주로 진공하는 게 아니냐는 오해를 하기도 했다. 호란 당시에도 조선조가 만주의 청나라와 합세해 쳐들어올까 전전긍긍했다. 왜란 및 호란은 모두 명청 교체기에 빚어진 사건이기는 하나 한반도가 중원의 안녕을 위협하는 매우 중요한 변수로 떠오른 첫 번째 사례에 해당한다.

두 번째 사례는 청일전쟁이다. 중국이 한반도에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실제로 이 전쟁을 계기로 일본의 상승세는 압록강을 넘어 일시에 만주로 뻗어나갔다. 이는 청조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들어서는 결정적인 배경으로 작용했다. 1930년대의 중일전쟁은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한반도에 적대세력이 들어설 경우 중국은 안녕을 기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세 번째 사례는 한국전쟁이다. 이는 중국 수뇌부가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절감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국제정치 관점에서 볼 때 한국전쟁은 40년 가까운 군벌상쟁 끝에 가까스로 일궈낸 ‘중화제국’의 근간을 뿌리 채 뒤흔들 수 있는 일대 사건이었다. 한반도 전체가 미국의 영향 하에 들어가면 대만과 한반도에서 대륙을 향해 남북으로 협공을 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비록 스탈린의 지원을 전제로 한 것이기는 했으나 한국전쟁 개입은 일종의 ‘도박’ 성격을 띠고 있었다.

2010년 6월 17일자 가 상하이 화동사범대 선즈화 교수의 말을 인용해 6.25전쟁은 김일성이 소련과 중국의 승인을 배경으로 감행한 ‘남침’이라고 보도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한반도에 대한 ‘신 중화제국’의 기본입장이 변화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크게 두 가지 논거를 들 수 있다.

첫째 김정일 체제의 붕괴를 염두에 둔 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 모든 나라를 통틀어 3대에 걸쳐 세습을 이어간 나라는 없다. 김정일 이후 북한이 계속 존속할지 여부를 장담키 어려운 상황이다. 이는 중국이 계속 뒤에서 도와준다고 될 일도 아니다. 특히 G2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있는 현 상황에서는 돌출행동을 일삼는 북한을 계속 옹호하는데도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유사시 김정일 체제를 포기한다는 복안을 마련해 놓았을 공산이 크다.

둘째 남한이 한반도를 통일할지라도 중원에 위협이 되지는 않으리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다. 사실 이게 중국 수뇌부의 진정한 속셈에 가깝다. 중국의 역대 왕조는 조선을 흉노와 몽골, 거란, 여진, 왜 등의 역이:逆夷와 정반대되는 순이順夷로 간주해 왔다. 이런 판단은 7세기 중엽에 소위 ‘통일신라’가 들어선 이래 무려 1300여 년 동안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2010년을 기점으로 G2의 일원으로 당당히 부상한 상황에서 과거처럼 피해의식에 젖어 중화경제권의 일원으로 가담하고 있는 남한을 굳이 잠재적인 적대세력으로 간주할 필요가 없다. 한반도에 등장한 역대 왕조가 1천여 년 넘게 ‘순이’로 존재해 온 역사적 사실이 중요한 참고사항이 되었을 수 있다. 실제로 한반도가 중원에 결정적인 위협이 된 것은 모두 일본이 조선을 강점한 19세기 이후다.

한국전쟁 참여를 계기로 북한을 ‘혈맹’, 남한을 ‘미제의 앞잡이’로 간주한 것은 당시에는 나름대로 타당했으나 21세기 상황과는 동떨어져 있다.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해법은 매우 간단하다. 북한이 김정일 사후 혼란에 빠졌을 때 남한에 의한 통일을 적극 수용하면 된다. 문제는 장차 한반도에 들어설 새 정권의 성향이다. 남한의 이명박 정부는 객관적으로 볼 때 친미세력에 가깝다. 그러나 젊은 층을 비롯한 서민층은 결코 중국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다. 오히려 이들은 잠재적인 우호세력으로 분류할 수도 있다. 정일의 예상되는 사망시점과 맞물려 중도좌파 내지 중도우파의 새로운 세력이 주도권을 쥘 경우 남한에 의한 통일이 오히려 중국의 안녕과 번영에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다.

실제로 구한말에 이를 뒷받침하는 일이 빚어진 바 있다. 청일전쟁 직전 이홍장은 일본을 견제키 위해 한미수교 체결에 앞장섰다. 전래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수법을 구사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홍장의 착각이었다. 미국과 일본이 서로 필리핀과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이익을 보장하는 ‘카츠라- 태프트 비밀협약’을 맺은 게 그 증거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은 제국의 안녕을 지키기 위한 최전선으로 기능했다. 남한을 보는 눈 또한 색안경을 쓰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등소평의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물론 남한도 사정이 크게 바뀌었다. 구태여 낡은 색안경을 쓰고 한반도를 바라볼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이제 G2의 일원으로 부상한 만큼 세계전략의 밑그림을 완전히 새롭게 짤 필요가 높아졌다. 현재 중국학자들은 한국이 왜 통일을 주도적으로 이루지 못하는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한국정부의 기민하면서도 정교한 대응이 절실히 요구되는 이유다.

중국은 지금 무서운 속도로 ‘세계의 공장’에서 ‘세계의 시장’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지경학적地經學的 이점을 살려 선점할 필요가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소설 {삼국지} 등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중국을 잘 알고 있다는 근거 자만심에 빠져 있다. 중국전문가를 자처하는 자들도 크게 다를 게 없다. 온갖 전망을 쏟아내고 있지만 이게 적중할 리 없다. 일렁이는 파문만 보고 온갖 전망을 쏟아내는 격이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듯이 모든 현상은 오랜 시간을 두고 그 원인이 누적된 결과로 드러나는 것이다. 중국이 21세기 ‘창조국가’를 꿈꾸게 된 과정도 마찬가지다. 본서가 ‘중화민국 시대’ 이래 21세기 ‘G2’ 시기에 이르기까지 중국을 이끌어온 개개 인물의 면면을 면밀히 추적한 이유다. 군벌의 각축을 비롯해 장개석과 모택동, 주은래, 등소평 등의 생장과정과 리더십을 추적한 본서는 지난 2010년에 펴낸 {인물로 보는 중국근대사}의 자매편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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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정보

| 저자서문 | 6

| 들어가는 글 | 12



[ 01 ] 군 벌 중화제국 건설에 도전한 무장단 31

[ 02 ] 장 개 석 중화제국 건설에 실패한 풍운아 87

[ 03 ] 모 택 동 중화제국 건설에 성공한 혁명아 199

[ 04 ] 주 은 래 중화제국의 동요를 막은 명재상 363

[ 05 ] 등 소 평 중화제국의 변신을 꾀한 부도옹 467



| 부록 1 | 등소평의 후예들 661

| 부록 2 | 중국 현대사 연표 687

참고문헌 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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