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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의 역사 (소크라테스에서 스티븐 호킹까지 혁신의 시대를 이끈 위대한 의심가들의 연대기)
의심의 역사 (소크라테스에서 스티븐 호킹까지 혁신의 시대를 이끈 위대한 의심가들의 연대기)
저자 : 제니퍼 마이클 헥트
출판사 : 이마고
출판년 : 2011
ISBN : 9788990429995

책소개

고대부터 현대까지 2600년 동안 동서양의 '종교적 의심'을 연대기적으로 살펴보는 책이다. 과학사를 전공한 저자는 그리스신화에서부터 유대교,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전 세계 각 지역종교의 발생과 변천 과정을 추적하는 것을 시작으로, 믿음의 역사(종교사) 이면에 가려진 활발한 '의심의 역사'를 재구성한다.



믿음과 확실성이 지배적인 시대, 문명이 정점에 선 순간들에 주목하는 여느 역사서와 달리, 이 책은 그것이 몰락하고 해체되어 의심이 팽배해지는 역사의 과도기에 더 관심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 의심의 역사는 믿음의 역사의 네거티브 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단순히 실체 없는, 믿음의 역사의 그림자는 아니다.



이 책은 언뜻 무질서하고 단편적으로 보이는 의심가들의 출현과 주장들 사이에 어떤 상호 영향관계가 있는지, 의심이 어떻게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서로 만나고 점점 확장되어왔으며, 어떻게 믿음을 부정하고 대안을 제시해왔는지를 추적함으로써, 의심을 종교에 맞먹는 인류의 소중한 지적 전통으로 자리매김한다.



동서양의 거의 모든 철학, 종교, 과학을 훑으며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의 다양한 의심은 크게 7가지 범주로 분류할 수 있다. 과학(유물론과 합리주의), 비신론적 초월론(신 없는 종교), 세계주의적 상대주의, 우아한 삶의 철학, 불의에 대한 도덕적 거부, 철학적 회의주의와 신자들의 의심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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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의심의 역사》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2600년 동안 동서양의 ‘종교적 의심’을 연대기적으로 살펴보는 책이다. 과학사를 전공한 저자는 그리스신화에서부터 유대교,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전 세계 각 지역종교의 발생과 변천 과정을 추적하는 것을 시작으로, 믿음의 역사(종교사) 이면에 가려진 활발한 ‘의심의 역사’를 재구성한다.

의심에도 역사가 있는가?
믿음과 확실성이 지배적인 시대, 문명이 정점에 선 순간들에 주목하는 여느 역사서와 달리, 이 책은 그것이 몰락하고 해체되어 의심이 팽배해지는 역사의 과도기에 더 관심을 갖는다. (예를 들어, 그리스시대--로마시대가 아니라 그 사이의 헬레니즘 시대에 이 책은 더 주목한다.) 이런 점에서 의심의 역사는 믿음의 역사의 네거티브 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단순히 실체 없는, 믿음의 역사의 그림자는 아니다. 이 책은 언뜻 무질서하고 단편적으로 보이는 의심가들의 출현과 주장들 사이에 어떤 상호 영향관계가 있는지, 의심이 어떻게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서로 만나고 점점 확장되어왔으며, 어떻게 믿음을 부정하고 대안을 제시해왔는지를 추적함으로써, 의심을 종교에 맞먹는 인류의 소중한 지적 전통으로 자리매김한다.
이 책의 핵심 메시지 중 하나가 바로 책제목이 시사하는 바 그대로, 의심에도 이처럼 역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의심은 독자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의심가가 된다는 것은 위대한 전통과의 만남이고 조용한 존경과 열린 자부심으로 가득한 삶을 의미한다.” 종교와 “신앙이 멋진 것일 수는 있겠지만 유일한 멋진 것은 아니다.” 종교적 거장들이 위대한 말들로 세계를 영원히 바꿔놓았다면, 의심도 신앙 못지않은 생동감과 열정으로 지혜로운 삶의 태도를 처방해왔으며 성실하게 진리를 추구해왔다. 믿음에 거룩한 성인과 순교자들이 있다면, 의심에도 당대의 권력과 사회통념에 도전함으로써 역사를 진전시켰던 위대한 ‘의심의 영웅’들이 있었다.

믿음과 의심의 기원 - 두 의미세계의 분열
의심의 역사를 살펴본다는 것은 곧 오늘날 과학과 종교의 대립과 갈등을 어떻게 이해하고 화해시킬 수 있을지를 모색하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에 따르면, 믿음과 의심은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곧 인간은 두 가지 의미세계에서 분열된 채 살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우리 머릿속의 세계로, 이성과 계획, 사랑과 목적의 세계다. 다른 하나는 그런 인간적 요소를 초월한 세계, 우리에게 무심한 우주 그 자체다. 우리는 인간적인데, 우주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다. 우주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인간사의 모든 가치, 감정은 하찮게 여겨진다. 우주에 어떤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우리는 살아갈 수 없을 것만 같다.
모든 종교적 거장들은 이 두 세계를 조화시키려 시도했다. 그것은 대체로 우주에 인간적 의미를 부여하거나(신에게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목적이 있다, 신은 정의롭고 선하다) 일상 삶에 우주의 비인간성을 고취시키는(인간이 중시하는 관심사는 환상에 불과하다, 무한과 영원에 주의를 기울이라, 속세를 떠나 우주의 참뜻을 깨달으라) 것이었다. 곧 인간세계에는 무의미를, 인간의 통제를 초월하는 세계에는 의미를.
위대한 의심가들도 이러한 인간세계와 우주의 분열 문제에 천착했고, 종교적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며 우주에 대한 새로운 합리적 모델들(원자론, 지동설, 진화론 등)을 제시했다. 이 책은 역사적 의심가들이 고민했던 궁극적인 문제, 즉 우리는 무엇을 믿을 수 있는가, 그 믿음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풍성한 답을 담고 있다.

의심의 역사적 패턴
의심은 극히 개인적 경험이지만 거의 언제나 공동체와 관련이 있다. 공동체 모두가 같은 믿음을 지닐 때 의심은 침잠한다. 원시적 공동체는 인간세계와 우주의 중간자였다. 그 안정적이고 통합된 힘 아래 소속되고 복종함으로써, 특히 공동체의 신(들)을 숭배함으로써 개인은 의심의 여지없는 확실성에 안도할 수 있었다. 그들이 경험하는 자연현상의 경이로움, 숭배의식의 도취감, 꿈과 신탁의 신비로움을 통해 신들의 존재는 너무나 확실했으며, 그들에게 종교는 곧 역사이자 과학이었다.
그때 전승된 믿음에 의존하지 않고 세계의 메커니즘을 합리적 사고를 통해 설명하려는 일단의 사람들이 등장하고, 정치적 대격변을 통해 이질적인 문화와 종족이 혼합되는 거대 공동체, 코스모폴리탄(헬레니즘 시대, 로마시대, 중세 바그다드, 중국의 당나라, 르네상스기 유럽 그리고 현대)이 탄생한다. 그 속에서 ‘우리의 신’과 ‘그들의 신’의 차이를 알게 되면서 사람들 사이에 종교에 대한 상대주의와 비판적 태도가 퍼진다. 종교는 점점 우화로 여겨진다.
마침내, 확실성(그리고 이전의 이상적인 공동체적 삶)을 상실했다는 고통 속에서, 만연한 의심의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헌신적인 열성 신앙이 일어난다. 그것은 의심 없던 옛 신앙으로의 복귀가 아니었다. 이제 믿음은 자의식이 생겨 개인이 더 이상 의심하지 못하도록 강요한다. 의심하지 않고 믿는 것이 모든 율법에 우선한다.
이상이 의심과 믿음의 기본적 역학관계이자, 고대 그리스에서 헬레니즘 시대를 거쳐 기독교가 정착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대략적인 묘사다. 이를 좀더 확대해석하면, 근현대사는 중세의 절대적 믿음이 다시 해체되는 기나긴 세속화의 과정이며, 우리는 현재 다시 불가지론과 무신론이 두드러진 제2의 헬레니즘 시기를 살고 있는지 모른다. 어쩌면 이미 한쪽에서는 또 다른 열성 신앙(종교적 근본주의)이 다시 고개를 쳐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심의 역사를 살펴볼 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의심이 도리어 믿음을 강화하기도 하며, 의심을 통해 현대 신앙의 핵심인 적극적 믿음이 생겨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의심의 7가지 프로젝트
동서양의 거의 모든 철학, 종교, 과학을 훑으며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의 다양한 의심은 크게 7가지 범주로 분류할 수 있다. 과학(유물론과 합리주의), 비신론적 초월론(신 없는 종교), 세계주의적 상대주의, 우아한 삶의 철학, 불의에 대한 도덕적 거부, 철학적 회의주의와 신자들의 의심이 그것이다.

1.과학, 유물론, 합리주의
기원전 467년 아낙사고라스는 떨어진 운석을 보고 태양은 (헬리오스 신이 아니라) 타오르는 바위덩어리에 불과하다고 추측했다. 이것이 종교와 과학의 갈등의 기원이다. 그는 새로운 정보, 새로운 경험자료에 기초해 기존의 신들을 상정하던 방식에 도전했다. 하지만 새로운 의심은 의심을 처벌하는 새로운 죄목을 낳았다. 기원전 438년 무신론을 탄압하는 법이 제정되어 아낙사고라스는 이 법에 의해 최초로 고발되었다.
데모크리토스는 천체운동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와 경탄이 의인화된 신의 숭배로 이어졌다고 의심했다. 그는 사물의 영고성쇠를 관찰하여, 우주만물은 무언가 ‘가장 작은 것’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이라고 추론했다. 이 원자들은 우연히 질서 잡힌 패턴을 이루지만, 일단 패턴이 확립되면 우연적이지 않기에 우리는 그 작동방식을 예측할 수 있다. 이제 하늘은 더 이상 두렵지 않고, 인격화되어야 할 만큼 신비롭지도 않았다. 꿈이나 환상에서 보이는 신이나 신의 암시도 단순한 원자 활동의 소산, 순수하게 자연적인 현상으로 그는 보았다. 신과 같은 것이 있지만 실제 신은 아니라는 것이다. 원자론은 이후 세계를 자기 창조적인 것으로 보려는 이들에게 무수한 영감을 주었고, 19세기에 이르러 확고한 과학이론으로 인정받았다.
14세기 유대 과학자 게르소니데스(레비 벤 게르숌)는 암상자를 이용해 화성의 밝기 변화를 관찰함으로써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 오류가 있음을 발견했다. 비록 대안 모델을 찾지는 못했지만, 그의 의문은 코페르니쿠스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20세기 과학자들이 그의 업적을 기려 달의 분화구 중 하나에 그의 이름을 붙임으로써 그는 ‘최초의 달나라 랍비’가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당대 가장 유명인이었던 만큼 자신의 발언이 불러올 파장을 고려해 종교적 의심을 밝히는 데 신중했다. 하지만 1921년 뉴욕의 한 랍비가 그에게 신을 믿느냐고 물었을 때,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만물의 조화 속에 드러나는 스피노자 식의 신은 믿지만 인간의 운명과 행동에 관여하는 그런 신은 믿지 않습니다. …… 내게 어떤 종교적 성향이 있다면 그것은 과학을 통해 증명할 수 있는 세계의 구조에 대한 무한한 경외심일 뿐입니다.”

2.비신론적 초월론
의심의 역사에서 아시아는 무척 특별한 지위를 차지한다. 고대부터 그들에게는 신의 존재가 거의 의문의 중심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양인들 역시 인간세계 대 우주라는 동일한 문제의식을 공유했으나 그들이 발전시킨 해답은 ‘신 없는 종교’ 곧 비신론(nontheism)적 초월론이었다. 이는 서양의 유력한 유신론 논증, 즉 ‘보편적 동의’(모든 사람이 신을 알고 있으므로 신은 분명 존재한다)에 대한 중요한 반론이었다.
힌두교에는 비록 여러 신이 있었지만, 그들은 세계를 창조하거나 유지하지 않았다. 우파니샤드 이후 이보다 강력한 대안적 믿음이 생겨났으니, 바로 윤회와 카르마(업)라는 우주의 재탄생 메커니즘이었다. 사람들은 엄격한 요가 수행을 통해 아트만(참 자아)을 깨달음으로써 이 영겁의 쳇바퀴에서의 해탈을 추구했다.
불교를 창시한 싯다르타도 이런 요가 수행에 몰두하던 중, 아트만과 같은 것은 없다는 혁명적 깨달음에 이른다. 그리하여 ‘자신 대 세계’의 의식에서 벗어나 우주와 하나가 됨으로써 그 영원함에 동참하는 정신훈련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불교는 인도의 전통적 신들을 거부했으며, 어떤 초자연적 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위대한 지도자들을 ‘붓다’로 기렸지만, 그것은 초자연적인 숭배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해탈의 길을 따라 정진한 자들에 대한 경의의 표시였다.
중국의 양대 종교, 유교와 도교도 좀더 현세적이냐 초월적이냐의 차이는 있었으나 모두 무신론적이었다. 실제로 17세기 중국에 기독교를 전파한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리치는 중국인들에게 신의 개념을 소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천(天)’이나 ‘상제(上帝)’ 같은 옛 표현을 빌려왔으나, 당시 중국 유학자들에게 그것은 그저 물질세계로서의 하늘을 의미했다. 중국의 무신론은 오히려 르네상스기 유럽의 의심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무신론자이면서 성경에 기록된 역사보다 더 오랫동안 서양인보다 더 위대한 문명을 이루며 잘 살고 있는 중국인의 존재는 그들 의심의 산증인이었다.

3.세계주의적 상대주의
일찍이 철학자들은 다른 문화권의 신관을 알게 되면서 인격신을 자민족중심주의로 이해했다. 크세노파네스의 유명한 비유, 즉 만약 마소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신을 마소의 이미지로 묘사할 것이며, 트라키아인들은 파란 눈에 붉은 머리의 신들을 그리는 반면, 에티오피아인들은 신을 검은 피부에 납작코로 묘사한다는 지적은 두고두고 의심가들에게 회자되었다.
프로디코스는 원래 신들은 인간의 생존에 커다란 공헌을 한 영웅들이었는데, 죽어서 칭송되다가 결국 신화로 만들어져 신성을 띠게 되었다고 보았다. 포도주의 발명가가 숭배되다가 결국 디오니소스 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만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신성시됨으로써 설득력을 더해갔다. “이제 통치자가 신으로 이해된다면, 옛 신들을 한때 통치자로 상상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작은 비약에 불과했다.”
중세 초기 이슬람의 시인 알마아리 역시 크세노파네스처럼 사람들은 믿도록 배운 것을 믿는다고 생각했다. “우리 젊은이는 부모가 익혀준 믿음 속에서 성장한다. 젊은이에게 신앙심을 심어주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가족이 가르치는 종교이다.”
종교재판이 한창이던 16세기, 《치즈와 구더기》로 잘 알려진 물레방앗간 주인 메노키오는 존 맨더빌의 여행기를 읽고서 “세상에 여러 나라가 있듯이 어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믿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저런 식으로 믿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진술한다. 맨더빌은 몇몇 민족들은 신이나 성경을 전혀 모르지만 훌륭한 미덕을 갖추고 있다고 말하면서, 종교전쟁, 파문, 이교도 화형이 기승을 부리던 시대에 종교적 관용을 호소했다.

4.우아한 삶의 철학
신이 없는 세계, 종교적 확실성을 상실한 이 혼란하고 불안한 세계에서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헬레니즘 시기의 네 철학 유파(키니코스학파,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 회의주의학파)는 흔히 세속철학이라고 평가절하되지만, 저자는 이들을 ‘우아한 삶의 철학’이라고 부르며, 신이 없는 현세적 삶에서 실질적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을 가르쳐줌으로써 세속종교에 가까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우아한 삶의 철학은 숲에서 길을 잃고 집을 찾는 데 지칠 대로 지친 당대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그 숲을 인간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즐기라고 충고했다.
의심의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 이 책에서도 수많은 의심가들에 의해 계속 되풀이해 인용되는 철학자를 한 명만 뽑는다면, 단연 에피쿠로스다. 에피쿠로스는 인간은 누구나 행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행복을 가로막는 세 가지 장애(죽음의 공포, 고통의 공포, 신의 공포)를 합리적 세계관을 제시함으로써 극복하고자 했다. 그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받아들여,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사에 관심이 있는 신, 영혼불멸 등의 개념을 비판했다. “다수가 숭배하는 신을 부인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수가 믿는 바를 신에게서 확인하는 자가 진정 불경한 것이다.”
현대인의 상식에 가장 가까운 그의 주장은 흔히 쾌락주의로 오해된다. 그러나 그가 진정한 쾌락으로 내세운 것은 육체적?감각적 쾌락이 아니라 지적 연구와 우정, 고요한 명상 같은 것이었다. “현명한 자의 불행이 바보의 번영보다 낫다. 어려운 진실이 경이로운 허위보다 낫다. 행동하는 중에 행복감이 일고 현실을 받아들일 때 마음의 평화가 깃들기 때문에, 변전하는 우연과 근심걱정은 큰 힘을 발휘할 수 없다. 나쁜 일이라고 해서 진정 나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알고서 적극 받아들이라. 신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을 극복하라. 그리고 행복하라.”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오늘날 전 세계 헌법들에 ‘행복 추구권’으로 각인돼 있다. 이를 세계 최초로 독립선언문에 집어넣은 미국의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유명한 에피쿠로스 추종자였으며, 종교의 자유를 열렬히 주창한 탁월한 의심가였다. “신의 존재마저도 과감히 의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아마 신이 있다면 신도 맹목적인 믿음보다는 이성에 대한 믿음을 옹호하실 것입니다. ……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과에 이르더라도 미덕, 타인에 대한 사랑을 행함으로써 느낄 수 있는 만족감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제퍼슨을 비롯해 벤저민 프랭클린, 존 애덤스, 토머스 페인 등 미 건국의 주요 인사들이 모두 의심가들이었으며, 미국은 알려진 대로 복음주의가 아니라 확고한 의심의 전통에서 출발한 나라라는 것이 이 책의 또 다른 핵심 메시지이다.)

5.불의에 대한 도덕적 거부
우리의 삶은 불공정하다. 우리는 정의를 갈망하지만, 세상에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고통스런 일들이 별 이유도 없이 벌어진다. 세상에 존재하는 불의의 문제는 많은 신앙인들을 회의에 빠지게 한 민감한 주제였다. 근대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에피쿠로스에 대해 말하며 문제를 이렇게 정식화한다. “신이 악을 막아내고자 하지만 그럴 능력이 없다면 신은 무능하다. 능력은 있는데 그럴 의향이 없다면 신은 악하다. 능력도 있고 의향도 있다면? 그렇다면 악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저자는 여기서 흥미롭게도, 성서 가운데 〈욥기〉를 의심의 텍스트로 다시 읽는다. 욥은 선량한 사람으로 신에게 축복받았다. 그러나 어느 날 신은 그의 신실함을 놓고 사탄과 내기를 벌인다. 신은 욥의 죄 없는 가축과 사람들을 죽이고, 사탄이 그를 괴롭히도록 내버려둔다. 욥은 그래도 신을 믿는다. 그러나 친구들이 나타나 이 모든 게 신의 정의에 부합한다고 말하자 마침내 분노를 터트린다. 사악하고 타락한 자들은 처벌받지 않고 복을 누리며, 선한 자들이 오히려 고통을 당하는 세상이 어떻게 공정할 수 있는가? 신이 나타나 욥을 꾸짖고 다시 선물을 주어 화해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나지만 의심은 여전히 남는다. 여기서 신은 풍부하고 경이롭지만 폭력적이고 무질서하기도 한 우주 자체에 대한 메타포처럼 보인다. 인간에게는 정의가 있지만 신에게는 없다. 세상은 정의롭지 못하다. 정의가 존재한다 해도 그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식은 아니다. 〈욥기〉는 이런 정의 없는 세계에 대한 체념의 우화이다.
스피노자와 더불어 유대인들이 가장 증오한 불신자는 서기 1~2세기 경의 엘리샤 벤 아부야다. 탈무드에 따르면 이 존경받던 랍비는 어느 날 나무에 올라 계율을 수행하다가 떨어져 죽은 소년을 보고 외친다. “모든 것이 거짓이다. …… 세상에 정의는 없다. 심판도 없다. 신이 없기 때문이다.”
현대 작가 엘리 위젤은 홀로코스트 당시 죽음의 수용소에서 가장 사랑받던 어린아이를 게슈타포가 데리고 가 목매달아 죽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것을 보고 누군가가 “도대체 지금 신은 어디 있는가?” 하고 말하자 위젤은 중얼거린다. “어디 있느냐고? 그는 지금 여기에 있다. 그는 지금 이곳에 목매달려 있다.”

이 외에도 이 책에는 고대 인도의 유물론 학파 차르바카에서부터 피론,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몽테뉴, 흄에 이르기까지 신의 존재뿐 아니라 더 나아가 세계를 이해하는 인간의 능력을 의심했던 ‘철학적 회의주의’ 그리고 예수가 물 위는 걷는 기적을 보고 따라하다가 순간 의심에 사로잡혔던 베드로, 예수의 부활 소식을 전해 듣고 의심하는 도마,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당하며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말했던 예수 등 ‘신자들의 의심’ 사례도 빼곡하다. 이러한 7가지 의심들은 각각 무관한 것이 아니라 의심의 역사 내내 서로 뒤얽히면서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았다.

의심의 영웅들
근현대 들어 계몽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의심이 활발히 개진되기 전까지 의심은 중세 내내 탄압받았다. 1277년 교황청은 219개조의 금지사항을 발표했는데, 예를 들어 ‘신학적 논의는 우화에 바탕한다.’ ‘기독교의 계시는 학문의 방해물이다.’ ‘자명한 것이 아니거나 자명한 것으로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그 무엇도 믿어서는 안 된다.’와 같은 주장을 누구도 해서는 안 된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는 거꾸로 중세에도 이처럼 많은 의심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저자는 이처럼 의심이 억압받던 상황, 의심가들이 신을 들먹이며 본의를 위장해야 했던 시대의 글들에서 행간을 읽어내며, 히파티아(기독교 광신도들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었다)나 조르다노 브루노(근대 과학적 세계관을 옹호하다 화형당했다) 같은 전설적 의심의 순교자뿐 아니라 종교재판에서 희생당한 많은 평범한 사람들을 의심의 영웅으로 기린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것이 탈무드가 전하는 미리암 이야기이다.
오랜 바빌론 유수 후 유대인들 역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만든 헬레니즘 문화권에 놓이게 되었다. 헬레니즘은 최초의 코스모폴리탄(세계주의) 문명으로서 세속주의와 보편주의에 기초한, 이전 어느 시대보다 자유롭고 평등하고 활기 넘치는 시대였다. 그리스인들은 유대인의 전통과 종교에 관대했으며, 점점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스의 철학과 예술, 교육과 종교를 접하며 그 세련된 즐거움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보수적인 율법주의자들은 이런 추세가 못마땅했다. 그들은 더욱 엄격한 고립주의 신앙으로 돌아섰고, 이것이 소위 원리주의(근본주의)라고 불리는 모든 종교적 극단주의의 기원이다. 경건파 대 배교자(그리스 문화에 동화한 진보적인 유대인)들의 대립이 격화될 무렵, 유대제사장의 친척인 미리암이라는 여인이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들어가 제단을 신발로 탁탁 치며 “늑대야, 늑대야, 네가 이스라엘의 부를 허비했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교양 있는 유대인들은 사회자원을 편협한 지역주의적 신에 대한 제사에 소모하기보다는 세속적 헬레니즘의 문화생활에 충당해야 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경건파 율법주의자들은 하스몬과 그의 아들 유다(나중에 망치라는 뜻의 ‘마카베오’로 불린다)의 지휘 아래 게릴라전을 펼쳐 예루살렘을 점령하고(이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 크리스마스를 대체한 유대교의 명절 ‘하누카’다), 헬레니즘화된 진보적 유대인들을 처단하고, 사내들에게 강제로 할례를 행했다. 미리암 역시 처벌받았다. 흔히 이교 압제자에 맞선 저항의 승리로 기려지는 이 사건을 돌아보며 저자는 말한다. “유다와 망치가 일종의 영웅이라면, 미리암과 신발은 더 넓은 영역의 지혜와 열린 마음의 미덕을 옹호하는 또 다른 종류의 영웅이다.”

이밖에도 이 책은 흥미로운 여러 의심의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신론을 공격하는 책을 읽다가 오히려 이신론에 매료되었으며, 《자연사》로 유명한 고대 로마의 학자 플리니우스는 하늘에서 피 비가 내릴 수는 있어도 사후세계는 못 믿겠다고 말했다. 19세기 영국의 정치가 찰스 브래들로는 ‘서약’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동료 국회의원들에 의해 시계탑에 갇힌 마지막 수감자가 되었으며, 프로이트는 종교가 아버지에 대한 아이의 감정에서 생겨난 것이라며, 인류가 이 유아적 신경증의 단계를 벗어나 ‘성숙’하기를 희망했다.
키케로에서 흄, 쇼펜하우어, 프로이트로 이어지는 의심 논쟁(서로 상이한 주장을 하는 가상의 인물들 간의 대화)도 흥미로우며, 〈전도서〉의 저자 코헬렛의 주장이 얼마나 에피쿠로스와 가까운지를 발견하는 것도 신선한 충격이다. 무엇보다 알와라크, 알라완디, 알라지 등 알라와 무함마드, 코란까지도 의심한 중세 이슬람의 의심가들을 비롯해 루키아노스, 왕충, 율리우스 카이사르 바니니, 프랑수아 라블레 같은 미지의 혹은 잊혀진 의심가들을 발굴해낸 것은 이 책의 큰 공이다.
의심의 역사는 종교와 나란히 이어져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앞으로도 자신들이 자라온 사회의 종교적 믿음에 의심을 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며, 더 긴밀한 세계주의는 사상의 교류와 의심의 확대를 촉진할 것이다. 우리가 이 지난했던 세속화의 과정, 의심의 역사에 대해 잘 알게 된다면 과학과 종교, 신앙과 불신의 불필요한 갈등과 대립, 소모적 논쟁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인류사의 모든 종교적 의심을 담고 있는 이 방대한 책의 메시지는 의외로 간단하다. 의심에는 분명한 역사가 존재하며, 의심은 멋진 일이고, 의심하는 사람은 당신 혼자가 아니다. 의심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종교인 선불교의 격언처럼, “의심이 크면 깨달음도 크고, 의심이 작으면 깨달음도 작고, 의심이 없으면 깨달음도 없다.” 의심은 인류의 창조성의 엔진으로서 모든 지적 발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으며, 전 사회가 종교적 근본주의 같은 확실성에 휘둘릴 때 그 위험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 되어줄 것이다.

해외 서평
“따스한 문장, 명료한 통찰, 흠잡을 데 없는 조사. ‘의심’이라는 그동안 홀대받았던 주제에 대한 생생하고 사려 깊은 1급 연구서.” - 라이브러리 저널
“새로운 계몽을 위해 만약 구약성서가 필요하다면, 이 책이 좋은 후보다.” - 프리 인쿼리
“정보가 가득하고 생각을 바꾸는 힘을 지닌 굉장한 책.” - LA 타임스
“시적 산문으로 믿음과 부정의 투쟁을 아름답게 극화한 무게 있는 책.” - 퍼블리셔 위클리
“불신자들에 관한 깜짝 놀랄 만한 연대기” - 스켑틱 매거진
“의심이라는 대단히 중요한 주제를 다룬 이 책을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그러나 진지하게) 즐겼다. 저자는 엄청난 수의 철학자, 과학자, 문인들에 생기를 불어넣어 우리를 빠져들게 한다.” - 하워드 진(Howard Zinn)
“대단히 유연하고 귀중한 책. 저자는 말한다. ‘극히 의심에 찬 텍스트가 여전히 종교적 글일 수 있으며, 뛰어난 의심은 믿음에 빛을 던져준다.’ 그녀 자신의 글이 확실히 그렇다.” - 뉴욕타임스 북리뷰
“자유사상가들을 위한 자립 가이드” - 보스턴 피닉스
“이 책을 읽는 것은 시원한 물 한잔을 마시는 것과 같다. 둘 다 머리를 맑게 하고 기분을 상쾌하게 해준다.” - 아칸소 데모크랫 가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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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정보

introdution_의심은 그림자가 아니다 : 퀴즈문제와 그 가이드
두 의미 세계의 대분열 l 의심의 유형

1 제우스와 헤라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 고대 그리스인들의 의심 600 BCE - 1 CE
우주의 메커니즘 l 이럴 리 없다 l 다른 세계 l 더 많은 메커니즘과 부동의 동자 l 헬레니즘 시대와 에우헤메로스의 탈신비화 l 키니코스학파 l 스토아학파 l 에피쿠로스학파 l 회의주의자들

2.성전 후려치기 - 의심과 고대 유대인 600 BCE - 1 CE
제단의 제우스 l 〈욥기〉 l 〈전도서〉

3.부처는 무엇을 보았나? - 고대 아시아의 의심 600 BCE - 1 CE
힌두교 l 차르바카 l 자이나교와 불교 l 불교의 심화된 의심과 중국의 의심의 전통

4.로마가 의심에 빠졌을 때 - 이성의 제국 50 BCE - 200 CE
키케로 l 루크레티우스 l 플리니우스 l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l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l 루키아노스 사모사텐시스

5.기독교의 의심, 선불교, 엘리샤 그리고 히파티아 - 후기 고전기의 혼합 1- 800 CE
예수 시대의 유대인 l 걱정이 많은 신 l 오전 내내 아브라함을 따른 바울 l 동방의 영향과 영지주의 그리고 이단 l 성 아우구스티누스 l 엘리샤 벤 아부야의 유대 의심 l 히파티아와 세속철학의 종말 l 선과 위대한 의심

6.중세 의심의 공중제비 - 무슬림에서 유대인 그리고 기독교도까지 800 -1400
무슬림 회의주의 l 최초의 달나라 랍비 l 스콜라 합리주의와 유럽 르네상스

7.인쇄술과 순교자들의 시대 - 르네상스와 종교재판 1400 -1600
선과 동양세계의 의심들 l 고대인들이 전해준 충격 :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l 라블레에 대한 역사적 문제 l 종교재판 l 몽테뉴와 새로운 세계 l 불확실한 덴마크인과 프랑스 자유사상가들의 ‘ 타락’ l 중국의 예수회 교도들

8.태양의 흑점과 백악관의 의심가들 - 이성이 힘을 실어준 혁명들 1600 -1800
과학혁명 l 영국의 이신론자들 l 중국의 무신론과 과학혁명 l 계몽주의 l 미국을 세운 의심가들 l 두 명의 독일인이 의문에 답하다 l 이성의 축제 l 18세기의 선 문화

9.더 나은 세계를 위한 의심의 요구 - 과학과 개혁의 시대의 자유사상 1800 - 1900
멘델스존의 세 딸들 l 고수머리와 턱수염 l 의심의 철학자들 l 원자론과 진화론 l 세속주의 운동 l 의심의 시인들

10.불확실성의 원리 - 새로운 세계주의 1900 -
세속국가들 l 미국의 이단적 의심가들 l 법정에 선 다윈주의 l 시시포스의 철학자들 l 홀로코스트와 욥의 귀환 l 냉전과 포스트모던 문화 l 계몽이 계몽을 만나다 l 사탄의 시 l 새천년의 의심

condusion_의심의 즐거움 : 윤리, 논리, 분위기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