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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전쟁과 평화
20세기의 전쟁과 평화
저자 : 이리에 아키라
출판사 : 연암서가
출판년 : 2016
ISBN : 9788994054902

책소개

《역사가가 보는 현대 세계》를 선보여 신선한 반향을 일으킨 바 있는 하버드 대학 역사학부 이리에 아키라 교수가 『20세기의 전쟁과 평화』의 초판과 개정판 이후의 변화를 담은 개정원고를 반영한 신판이 조진구, 이종국 선생의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역사가가 보는 현대 세계』가 글로벌, 트랜스내셔널한 역사에 관심을 두어 특히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면 신작은 국제관계사를 전문으로 하면서 그동안 권력정치를 중심으로 전개된 19세기부터 현재에 이르는 100년의 역사적 과정을 역사적 통찰과 세계적 시야를 통하여 복수의 국가간 관계를 설명하면서 시계사적 전망을 하고 있다.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출판사 서평

아시아인 최초로 미국 역사학회 회장을 역임한
하버드 대학 이리에 아키라가 보는 20세기의 전쟁과 평화


2015년 역사와 현대 세계를 보는 관점을 담은 책 『역사가가 보는 현대 세계』를 선보여 신선한 반향을 일으킨 바 있는 하버드 대학 역사학부 이리에 아키라 교수의 『20세기의 전쟁과 평화』가 초판(1986)과 개정판(2000) 이후의 변화를 대폭 반영한 개정 원고를 수록하여 조진구·이종국 선생의 번역으로 연암서가에서 출간되었다. 『역사가가 보는 현대 세계』가 글로벌, 트랜스내셔널한 역사에 관심을 두어 특히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면 신작은 국제관계사를 전문으로 하면서 그동안 권력정치를 중심으로 전개된 19세기부터 현재에 이르는 100년의 역사적 과정을 역사적 통찰과 세계적 시야를 통하여 복수의 국가간 관계를 설명하면서 세계사적 전망을 하고 있다. 저자 이리에 아키라는 국제관계사 분야, 특히 미·일 외교사 및 중·일 관계에 관한 많은 연구 업적을 가지고 있으며, 전쟁과 평화, 문화교류를 중심으로 국제관계를 해석하는 미국과 일본에서 대표적인 역사학자이다.

∽∽∽

20세기는 종종 “전쟁과 혁명의 세기”였다고 묘사된다. 20세기는 로마노프 왕조를 무너뜨린 ‘러시아 혁명’으로부터 시작되어 두 번의 세계대전과 냉전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전쟁의 종식으로 막을 내렸다. 그 사이에 무수히 많은 전쟁과 혁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일어났으며, 따라가기조차 힘든 빠른 속도의 변화와 사건들이 이어졌다.
이런 커다란 변화는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에 바탕을 둔 것이며, 대영제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산업혁명으로 운송수단이 발달함으로써 군의 기동력은 크게 향상되었으며, 무기의 살상능력이 비약적으로 증대함으로써 전쟁으로 인한 피해 규모와 지역은 현저하게 증대되었다. 당연히 어떻게 전쟁을 막고 평화를 구축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이런 20세기의 최대 아포리아에 대한 역사가의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과 평화의 문제는 외교사, 국제법, 국제정치, 평화학 등 많은 학문영역의 연구테마였다. 영토와 민족, 종교, 경제적 이익 등 전쟁의 배경이나 원인을 규명하는 것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전쟁을 회피하려고 해왔는가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왔다. 전쟁을 회피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에 초점을 맞춘 것이 외교사라고 한다면, 전쟁과 국가의 행동을 법적인 측면에서 탐구하는 것이 국제법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많은 연구들이 국제관계에서의 행위주체, 즉 국가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한다면, 저자 이리에 교수는 국제관계도 궁극적으로는 개인 차원의 행위라고 보고 그런 관점에서 전쟁과 평화에 관한 다양한 사조와 관점들을 되돌아보고 있다. 전쟁과 평화를 국가나 권력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파워폴리틱스만이 아니라 비정부기구(NGO)나 시민사회, 사상이나 문화 같은 소프트파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외교사나 국제정치에 관심이 있는 대학(원)생이나 일반인들의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주요 내용

넓은 의미에서 문화란 한 국민이 쌓아 온 유산을 종합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미국의 사상가 루이스 멈포드(Lewis Mumford)의 말을 빌리자면 문화라는 것은 “인간이 기억해야 하고 기억된 경험”이다. 문화인류학자 마거릿 미드(Margaret Mead)는 “미국인에게는 과거만이 친근감을 줄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이 말은 다른 국가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멈포드나 미드의 정의에 의한 문화, 즉 과거 유산의 축적에는 정치·경제 제도와 조직, 예술과 사상, 관습 등도 포함된다. 쇼가 말하는 문화는 주로 후자를 가리키는 것이고, 전자는 권력이라고 정의되고 있다. 그러나 양자를 합쳐서 한 국가의 내적인 모든 행위를 모두 문화라고 하는 것도 가능하다. 따라서 이 개념을 사용할 경우 넓은 의미의 것과 좁은 의미의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음을 밝혀 두고 싶다. 한편 넓은 의미의 권력이라는 것은 한 나라의 대외적인 힘의 총화(總和)이다. 군사력은 그것의 가장 좋은 예이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군수산업 혹은 경제제도 전반, 나아가서 노동력이나 정치기구도 당연히 관계가 있다. 미드도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국내의 모든 것, 즉 문화의 힘을 결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넓은 의미의 문화는 넓은 의미의 권력의 기반이다. 문화와 권력은 표리일체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30쪽

비스마르크는 항상 평화라는 것은 국제질서의 안정화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원래 이러한 생각은 비스마르크에 의해 처음 제기된 것은 아니다. 나폴레옹 전쟁 후 빈회의에서 오스트리아의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Klemens von Metternich)는 전후 유럽의 안정을 위해 각국이 참가하는 동맹체제를 만들려고 하였고, 어떠한 형태로든 19세기의 유럽적인 국제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평화에 이르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견해는 평화의 조직론적 혹은 질서론적인 정의라고 말할 수 있다. 평화라는 것은 전쟁이 없는 상태이고 전쟁은 국제질서의 붕괴에 의해서 발생한다. 따라서 전쟁의 발발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안정된 국제질서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메테르니히가 만들어낸 ‘빈체제’가 좋은 예이다. 그리고 1848년을 전후하여 각국에서의 혁명과 정변의 영향으로 이 체제는 붕괴하기 시작했고, 그 후 20여 년간 유럽의 국가들 간에 전쟁과 내란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혼란의 시대는 1870년대에 들어와 일단 종말을 고하게 된다. 바로 그때 새로운 국제질서의 수립에 고심했던 사람이 비스마르크와 각국의 지도자들이었다. -34쪽

어느 시대에도 전략의 준비나 작전계획은 있는 법이지만 19세기 말에는 두세 가지의 특징이 있었다. 첫째로는 과학기술의 발달을 반영한 소위 근대전이 상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때까지 가령 고전적인 전쟁이라고 불러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육지에서는 보병과 기병의 정면충돌, 바다에서는 범선으로 구성된 함대 간의 대결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철공업의 발달, 교통 통신수단의 진보, 나아가서는 컴퓨터의 발명 등은 전쟁을 기계화해버렸다. 그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예는 철도의 이용일 것이다. 수송차량의 사용에 의해 보병뿐만 아니라 무기도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빠른 속도로 전선으로 보낼 수 있었다. 독일의 참모총장 알프레트 폰 슐리펜(Alfred von Schliffen)이 입안했던 대(對)프랑스 전략(벨기에와 네덜란드로부터 전격적으로 프랑스로 침공해 간다는 것)도 철도의 건설 없이는 불가능했던 것이었다. -40쪽

유럽에서의 대국 간의 전쟁계획에 상정되어 있던 미래의 전쟁이 다수의 국가를 휘말리게 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는 것이 당시 전쟁관의 다섯 번째 특징이다. 이미 1890년 독일의 참모총장 헬무트 폰 몰트케(Helmuth von Moltke)는 유럽에서 일어나는 다음 전쟁은 모든 강국이 참가하는 ‘제2의 7년 전쟁’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과연 그 정도로 긴 전쟁이 될 것인가를 둘러싸고 이견도 있었다. 몰트케의 후임인 슐리펜은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통과해서 프랑스를 공격하는 전격전을 감행한다면 비교적 전쟁은 빨리 종결될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었다. 다음 전쟁이 얼마나 길어질 것인가에 대한 일치된 견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14년 이전의 수십 년간 발생했던 전쟁(보불전쟁, 청일전쟁, 러시아·터키전쟁, 러일전쟁 및 몇 차례의 발칸전쟁)은 모두 단기간의 전쟁이었기 때문에 다음 전쟁도 비교적 빨리 끝날 것이라는 기대는 각국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영국의 역사가 졸(James Joll)이 그의 저서 『제1차 세계대전의 기원(The Origins of the First World War)』에서 말했던 것처럼 전전에 상정되었던 ‘전쟁’과 실제의 대전은 완전히 다른 별개의 것이었다. -44쪽

유럽 제국이 비서양의 각지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혹은 그 결과 전쟁의 가능성이 필연적으로 증대할 것이라는 것은 당시 일부 논객들 사이에 상식처럼 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긍정적인 견해와 부정적인 견해가 모두 있었다. 전자에 따르면 문명국(군사대국)이 야만적인 국가 내지 미개국이나 민족을 상대로 싸워 후자를 자신의 지배하에 두는 것은 역사의 필연적인 흐름일 뿐만 아니라, 문명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보았다. 앞에서 소개한 피어슨은 그러한 전쟁론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피어슨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긍정론자들 대부분이 비문명지역에서의 전쟁을 합리화하는 이론을 찾고 있었다. 가장 단순한 형태의 개념은 러디어드 키플링(Rudyard Kipling)의 『백인의 책무(The White Man’s Burden)』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서구제국은 문명 수준이 낮은 다른 민족을 위해 무력을 행사해서 질서 있는 사회를 만들 책임이 있다는 생각에 집약되어 있다. 미개한 종족이나 문명도가 낮은 유색국가는 스스로의 힘으로 진보할 수 없고, 반대로 시종일관 야만적인 행위를 함으로써 세계 각지에 불안정한 상태를 초래한다. 따라서 외부의 힘을 빌려 질서를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선진국의 힘과 원주민의 힘이 충돌하고 나아가 식민지 전쟁으로 발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것이다. -57쪽

1914년 8월에 발발했던 유럽의 대전을 당사자인 유럽인들이 어떻게 보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각국에서 치밀하게 연구되어 왔으며, 이 책에서 자세히 살펴볼 수는 없다. 전쟁이 현실이로 되어버린 이상 전쟁에 대한 이미지나 견해가 이전보다 훨씬 구체적이며 전후의 평화에 관한 문제가 전쟁 목적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병사로서 전장에 보내지거나 적군에 의해 점령당한 지역의 사람들이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전쟁에 대해서 다양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추상명사로서의 전쟁(war)이 구체적인 정관사가 붙는 전쟁(the war)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일반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어진 것은 아니다. 사실 현실의 전쟁이 장기화하면 할수록 도대체 전쟁이란 무엇인가, 평화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전쟁 당사자인 유럽인들보다 비참전국이었던 미국, 도중에 탈락한 러시아, 부분적으로밖에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일본 등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깊은 논의가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76쪽

전쟁에 대한 관념적인 견해, 혁명의 수단으로서의 평화 그리고 전쟁과 평화의 상대화라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가 있다. 이것과 미국에서의 전쟁·평화론을 비교해 보면 흥미롭다. 실제로 일어난 대전에 자신들이 참전한 후 미국은 도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는데 비해서 러시아는 전혀 이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보았다. 한편 미국에서 이 전쟁은 ‘모든 전쟁을 없애기 위한 전쟁’이었는데, 레닌 등은 머지않아 찾아올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국가 간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과 평화에 대한 양측의 구별은 매우 애매했다고 할 수 있다. 즉, 미국은 전쟁 속에서 평화를 묘사했고 러시아는 평화 속에서 전쟁을 생각하고 있었다. 양자 간의 경계선은 막연했다. 그러한 점에서는 윌슨도 레닌도 평화를 절대적인 것으로 보는 종래의 평화주의나 상시임전체제(常時臨戰體制)를 상정했던 영구전쟁국가론과도 다른 개혁(미국) 내지는 혁명(러시아)의 수단으로서의 전쟁과 평화라는 이념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99쪽

일본이 구미제국을 배우고 선진국의 전략론이나 평화의 개념을 흡수하는 데 전념하던 메이지시대에도 일본이 아시아의 일원이며 인종적 문화적으로 서양제국과 다르다는 인식이 없어진 적은 없었다. 다만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인식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서구에 수용되도록 국력을 충실히 하고 국제무대에서도 이들 국가와 동등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았다. 전쟁과 평화론의 발전과정에서 가장 단적인 예는 삼국간섭(1895)에서 러일전쟁(1904~1905)에 이르는 시기의 일본의 입장이었을 것이다. 모처럼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겨 승자의 평화를 획득하고도 러시아, 프랑스 그리고 독일의 간섭에 의해서 그 평화(남만주의 권익)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10년 후 이번에는 미국, 영국 그리고 프랑스의 암묵적인 양해 하에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해 남만주에서의 지위를 획득했다는 것은 일본에게 전쟁과 평화가 얼마나 구미열강의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주었다. 아시아에 고립되어 있어서는 전쟁도 평화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102쪽

사회주의자나 마르크스주의자 이외에는 선진국 간의 전쟁은 반드시 필연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 전전의 일반적인 견해였는데, 전후 이러한 신념은 더욱 강화된다. 또한 강화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평화가 하나의 이상(理想)으로서 이전보다 훨씬 중심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예를 들면 프랑스의 정치가 아리스티드 브리앙(Aristide Briand)은 “평화야말로 가장 중요한 목표이며, 평화 앞에서는 어떠한 특수 사정도 희망도 희생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떠한 것보다 더욱 평화를 지켜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지만, 이전보다 평화라는 것이 한층 도덕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역으로 말하면 그만큼 전쟁을 비도덕적인 것으로 죄악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 경우 세계대전의 경험과 기억이 전쟁관의 기저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117쪽

무솔리니의 국가관에는 로맨틱한 측면도 있었다. 개인을 전체 속에 매몰시키고, 과거나 미래를 자기와 동일시하는 것은 사리사욕의 추구나 금전, 혹은 직장을 통한 인간관계를 어딘가 부족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숭고한 이상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근대 기계문명의 합리주의나 경제중점주의는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것이라면서 인간의 혼(魂)을 왜곡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개인을 다시 자유롭게 하고 해방하기 위해서는 비경제적, 비기계적 존재인 국가에 몸을 바치는 것이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는 국가에 대한 복종이 필요하다고 하는 역설은 신개인주의라고도 할 수 있고, 로맨틱한 인간상(人間像)과 전체주의을 결부시키면서 전쟁과 평화의 논리에 독특한 의미를 부여했던 것은 분명하다. -146쪽

국가의 독립(민족자결)과 상호의존적인 국제경제를 통한 세계평화가 자본주의 국가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자의 목표이기도 했다면 양자의 평화관에 커다란 차이가 존재했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민족해방운동과 반제국주의 투쟁은 당시 커다란 운동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이 대국을 끌어들인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았던 것은 근본적으로 국제질서가 경제적·사상적으로 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예를 들어 중국에서 쑨원(孫文)의 삼민주의(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는 국민당의 혁명외교를 지탱했던 이데올로기였는데, 이것은 본질적으로 구미의 국제질서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국의 주권회복이나 세계질서에의 편입은 자본주의 국가로서도 환영할 일이었다. 1928년에 국민당 정권이 성립하자, 곧바로 다른 국가들이 이를 승인하고 경제적, 기술적 원조를 시작했던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중국의 혁명주의자(일부 공산주의자를 제외하고)들이 품고 있던 전쟁·평화관은 결코 반체제적이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라틴아메리카의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쿠바, 멕시코 등에서는 미국의 압도적인 경제적 지위에 반발하여 민족주의적인 경제정책(외국인의 투자 규제 등)을 실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사상적으로는 국제협조주의를 내걸고 미국의 자본주의나 기술의 도입과 민족자결의 원칙에 입각한 평화를 상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이러한 이념은 미국의 견해와 다른 것이 아니었다. -150쪽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말할 경우 니버는 구체적으로 두 가지 원인을 들었다. 하나는 예전부터의 집단폭력, 국가의 대외지배지향으로 이것이 제1차 세계대전 후 일시적으로 억제되긴 하였지만, 결국 인간의 본성이나 국가의 배타성을 변화시키지는 못해 다시 힘의 의지(will to power)의 시대가 되었다는 인식이다.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 경제가 미증유의 위기에 직면하고, 각국 내에서의 계급대립 및 각국 간의 이해의 모순이 격화되고, 그 결과 전쟁 가능성이 증대했다는 것이다. 각국의 지배계급은 자본주의의 파탄으로부터 스스로를 구하기 위하여 극단적인 방법(전체주의)으로 권력을 결집시켜 대외적으로도 힘을 발전시키려 하고 있다. 경제위기가 심각하면 심각할수록 대외전쟁 등은 무리하게 행하여질 것이지만, 실제로는 빈곤이 한층 해외진출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해외시장을 독점하고 국내시장으로부터는 외국을 쫓아내려 한다. 그와 같은 경향이 “전쟁의 불씨를 안고 있다”는 것이 니버의 결론이었다. -163쪽

나치즘의 전쟁관은 당시 독일인이 자주 입에 담았던 ‘문화(Kultur)’의 개념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독일어의 Kultur는 원래 영어의 Culture와는 다른 여운을 가지고 있고, 특히 요한 헤르더(Johann Herder)나 요한 피히테(Johann Fichte) 등에 의해 독일인의 특유성을 강조하는 개념이지만, 1930년대에는 일반적인 ‘문화’와의 차이가 한층 확실해졌다. 말하자면 ‘문화’는 근대문명의 개인주의나 물질주의, 혹은 기독교나 고대문명의 보편적 개념을 나타내고, 따라서 힘을 중요시하는 독일과는 양립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의 서양문명은 국제주의나 평화와 관련된다. 그런데 독일의 Kultur는 국민의 힘을 나타내고, 원시적·본능적·전투적인 것이다. 독일에서는 “부르주아 자본주의·합리주의·자유주의·인도주의를 대신해, 비합리주의나 신비주의로 대표되는 신낭만주의의 시대가 도래하였다”라고 설파되었지만, 그것이 귀착하는 곳은 반지성주의와 반이성주의, 즉 반국제교류주의였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의 Kultur만이 인정받게 된다. -169쪽

민주주의 국가라도 정치적인 집단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으며, 따라서 스스로의 존재를 위해서도, 다른 민주주의 국가의 안전을 위해서도 정치력에 호소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견해는 그와 같은 관점에서는 아주 자연스런 것이다. 이것이 당시 나타난 사상의 두 번째 측면이다. 그때까지 지배적이었던 힘은 악이며 힘을 강조하는 것은 전체주의 국가를 답습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대신해 힘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닌 정치적 집합체의 근원적 요소이며 이것을 무시하고 전쟁이나 평화에 대해서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군사력에서도 그 존재 자체가 전쟁이나 평화를 규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는가, 무엇을 위하여 강화되는가, 그 강화가 국제정치나 경제상황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만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193쪽

경제적 국제주의, 문화교류, 사회개혁 등의 원칙은 보편적인 것이며 모든 국가가 이 원칙에 따름으로써 국제이해와 세계평화 달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전후의 평화논리였다. 그렇지만 제1차 세계대전 후와는 달리 이 논리에 대항하는 권력주의, 현실주의적인 개념이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이 어째서 그러했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냉전의 사상적 기반에 접근하는 것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적어도 구미 측에서 보아 보편적이라고 생각되었던 원칙이 소련이나 소련권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실망감, 또한 반대로 후자에서 그러한 원칙은 미국에 지배되는 국제질서를 세계 각지에 강요하는 것으로 인식돼버렸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 결과 보편적이어야 할 원리가 특수한 것으로 간주되고 힘의 대결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혹은 그 수단으로밖에 생각되지 않게 되었다. -224쪽

1963년 미·소 양국은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에 서명하고 소위 데탕트시대에 들어갔다. 데탕트는 평화공존 사상에 입각하여 두 강대국 간의 전쟁 회피를 목적으로 한 국제질서 구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냉전구조 그 자체를 바꿀 것인가, 아니면 냉전의 한 변형에 불과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1970년대 초에는 비교적 많은 논자들이 냉전의 종결을 믿고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1973년 봄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열린 ‘미국 외교정책의 선택’에 관한 심포지엄에 출석한 많은 학자, 저널리스트, 정부 관계자들은 ‘냉전 이후(Post-Cold War)’의 시기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참가자가 제출한 논문은 1975년 『세계정세와 미국(The United State in World Affairs)』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그 중 정치학자 세이욤 브라운(Seyom Brown)의 논문은 국제관계에서 사상적 대립이 약해지고 비군사적 요소가 중요성을 더해 가고, 더구나 전쟁에서 얻는 이익에 대한 의문이 커짐에 따라 이후 10년 내에 냉전은 ‘해소’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역사가인 어니스트 메이(Ernest R. May)도 거의 같은 시기에 출판된 유명한 저작 『역사의 교훈(Lessons of the Past)』에서 앞으로 10년간 냉전이 다시 격화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와 같은 견해는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전쟁 직후와는 다른 형태의 국제질서가 형성되고 있는 것 같다는 인식을 반영하고 있었다. 또한, 미·소 대립이 국제관계의 틀을 제공하고, 그 속에서 전쟁이나 평화를 보는 것 이외에는 이론화하기 어려웠던 시대에 비해 막연하지만 새로운 개념을 향한 모색이 시작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246쪽

국제관계의 역사는 ‘강대국의 흥망’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책이 폴 케네디(Paul Kennedy)에 의해 1987년, 즉 냉전 종결 직전에 출판되어 일본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여기서 우리는 전통적인 국제관계론을 엿볼 수 있으며, 파워의 수준이 다른 주권국가가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이상, 그 중 몇 나라가 대국이 되고, 나아가 초강대국이 되는 것은 말하자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힘의 관계는 항상 변화하는 것으로 오늘의 대국이 내일 그 지위를 상실하거나 어제까지는 약소 국가였던 나라가 어느 단계에서 힘을 축적해 대국에 도전하려고 하는 예는 끝이 없다. 폴 케네디의 『강대국의 흥망(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은 미국도 예외 없이 초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세계 각지에 세력을 부식시켜 놓은 결과 결국은 그 부담이 가중되어 패권적 지위를 잃을 가능성도 있을지 모른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냉전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 저자의 예상은 빗나갔다. 그러나 미국 다음의 대국의 지위를 노리고 있는 것은 일본이라든가 중국이라든가 하는 논의가 그 후에 있었던 것을 보면 국제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에는 큰 변화가 없는 것처럼 생각된다. -268쪽

1970년대에 활약한 또 하나의 INGO는 환경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오일쇼크를 계기로 석유를 대체할 에너지원으로서 원자력을 이용한 발전 시설들이 보급되기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대기와 물에 대한 방사능 오염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던 것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동시에 1960년대의 고도성장기가 끝난 시점에서 무제한적인 경제 발달에 대한 반성이 생겨난 것과도 관련이 있었다. 1973년에 발표된 소위 ‘로마 클럽(The Club of Rome)’의 보고서에서도 지적된 것과 같이 세계가 종래와 같은 경제 성장을 계속한다면 지구 자원이 고갈해버릴 것이며, 동시에 결국은 대기나 해수, 호수, 강물 등이 오염되어 인류가 생존하기 어려워질 것이라는 생각이 절실한 문제로 제기되었다. 더구나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의 생존도 위험하게 된다. 풍요롭게 된 혹은 풍요로워지길 바라는 인간이 지금까지보다 더 고래를 잡으려 하고, 상아를 구하려고 하며, 희귀식물을 채취하려고 한 결과 지구의 생태계 소위 에코시스템이 파괴되고, 그 결과 인간의 삶조차도 타격을 받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확산되었다. -275쪽

9·11 사건이 보여준 것은 지구시민적인 의식이 아직 일반화되지 않았다는 것, 오히려 글로벌화의 시대에 개별적인(local) 아이덴티티가 대단히 강하게 남아 있어 서로 다른 아이덴티티를 가진 사람들 사이의 대립이 야만적인 폭력행위를 초래하는 일조차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뿐일까? 지구상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공유하는 인간성이 아니라 개별적인 주의주장뿐인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세계화는 세계평화와 복지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돼버린다. 그러나 사건 이후 곳곳에서 나타난 반응을 보면 그러한 비관주의나 냉소주의가 반드시 정곡을 찌른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계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동시다발 테러사건을 비판했으며, 더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건을 ‘문명’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는 그들 사이에 공유된 말이나 생각이 있었던 것이며, 20세기를 통해 일반화되었던 문명관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공유하는 세계관, 역사관의 존재가 글로벌화를 좀 더 건설적인 방향을 향하게 하는 필수조건이라고 한다면 동시다발 테러사건이라는 비극을 통해 간신히 그것이 인식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3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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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정보

한국어판 저자 서문
증보판 서문
역자 서문

제1장 전쟁과 평화
1. 전쟁의 개념
2. 국제사와 국내사
3. 권력과 문화

제2장 세계대전에 이르는 길
1. 비스마르크의 국제질서
2. 군비확장과 전쟁준비
3. 국내정치, 사회의 구조
4. 국지전쟁의 가능성
5. 제국주의적 전쟁
6. 경제의 발달과 평화

제3장 미·소·일의 등장
1. 유럽의 내전에서 세계전쟁으로
2. 미국의 역할
3. 볼셰비즘과 평화
4. 일본에서의 전쟁과 평화
5. 파리강화회의의 의미

제4장 1920년대의 평화사상
1. 평화의 기반으로서의 군축과 통상
2. 혁명적 평화론의 성쇠
3. 지적 교류
4. 반(反)평화주의

제5장 평화론의 붕괴
1. 1930년대의 특징
2. 전쟁의 필연성
3. 전쟁과 문화
4. 평화사상의 좌절

제6장 권력구조로의 회귀
1. 힘의 대결
2. 제2차 세계대전의 사상적 기반
3. 전후 평화의 비전

제7장 냉전
1. 1945년의 ‘평화’
2. 현실주의의 융성
3. 평화의 모색

제8장 민족해방이라는 이름의 전쟁
1. 제3세계에서의 전쟁
2. 신국제경제질서에서 신냉전으로

제9장 비정부기구(NGO)와 국제사회
1. 냉전의 종결
2. 국제 테러의 등장
3. NGO의 활약
4. 문화의 다양성과 국제질서

제10장 전쟁과 평화의 20세기
1. 자기파괴와 자기재생
2. 역사를 보는 관점
3. 제1차 세계대전의 기원
4. 열쇠는 대국이 쥐고 있다
5.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
6. 세계화하지 않았던 국지전쟁
7. 글로벌화하는 평화의 움직임

제11장 국경을 초월한 사람들
1. 웰스의 예언
2. 20세기형 인간의 전형
3. 해외여행의 대중화
4. 유학생의 증대
5. 외국인 노동자의 증가
6. 인간은 바뀔 수 있는가

종장 세계화 시대의 평화 탐구
1. 9·11 동시다발 테러사건
2. 세계화의 두 얼굴
3. 세계관·역사관 공유의 진전
4. 반미감정과 미국의 역할
5. 테러는 인권침해
6. 평화롭고 안정된 세기의 실현

부록| 역사가 이리에 아키라가 추천하는 역사학 추천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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