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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품은 백두산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그린 최영섭 함장의 대서사시)
바다를 품은 백두산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그린 최영섭 함장의 대서사시)
저자 : 최영섭
출판사 : 프리덤앤위즈덤
출판년 : 2021
ISBN : 9791186337530

책소개

천안함장 예)대령 최원일

1999년 필자가 부산함(FF-959) 포술장으로 근무할 당시 더위가 한창일 무렵 한국해양소년단 일행을 태우고 울릉도, 독도 탐방차 항해 중이었다. 함교에서 항해당직근무 중이던 필자에게 어느 노신사 한 분이 방문하셨다. “최대위! 이 바다는 우리가 목숨 걸고 지킨 바다입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영문을 모르고 필자는 “아~예” 라고 대답하고 다시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함장님이 함교에 오셔서 최영섭 고문님을 찾고 계셔서 나는 조금 전 함교에 올라오신 그분이 최영섭 대령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직을 마치고 내려와 대한해협 해전에 대한 자료들을 찾아보고 전율을 느꼈다. 조금 전 내 앞에 계시던 그분이 백두산함의 갑판사관으로 전투에 참가하시고 한국전쟁 초반 풍전등화의 우리나라를 구하신 영웅이라니...
그 후 필자는 고속정 편대장, 함대, 해군작전사령부, 해군본부 등에서 여러 보직을 거치며 2008년 2함대 천안함장으로 부임을 하게 되었다. 즉 천안함 피격사건 당시의 지휘관인 천안함장이다. 2021년 2월말 전역을 하고 사회에 나와 제2의 인생을 시작하고 있다.
2010년 3월 26일 밤은 우리에게 잊지 못할, 아니 잊어서는 안 될 시간이다. 또한 이후의 사건들은 견딜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아니,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엄청난 일들이었다.
세월은 벌써 11년이 흘렀고 어느덧 나도 전역을 하게 되었으며 최대령님의 회고록을 읽으며 천안함 피격사건 후 함장의 입장에서 경험한 일들을 회상해 보았다.
그날 밤! 우리는 어떤 특별한 상황도 일부에서 제기하던 어떠한 특수임무나 훈련이 아닌 너무나 평상적인 상황에서 항상 작전을 수행하던 백령도 근해 그 곳에서 경비를 하고 있었다. 사건 전날 파도가 4미터 이상으로 높아 풍랑주의보가 발표되었고, 대청도 근해 피항을 할 정도로 나쁜 기상에서 조금 좋아졌지만 여전히 파도가 2.5~3미터로 높았다. 당시, 나는 사건 발생 약 10분 전까지 함내 순찰을 마치고 함장실로 돌아와 의자에 앉아 컴퓨터 문자망과 KNTDS 화면을 보던 중 “쾅~”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오른쪽으로 넘어가고 정전이 되며 우리의 모든 일상도 순식간에 날아가버렸다. 아직도 겪었던 모든 현실이 꿈만 같고, 꿈이었으면 하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생각한다. 바로 몇 분전까지 함께 생활하고 있었고 서로 말하고 호흡하던 전사한 내 생명 같은 사랑하는 부하들, 또 암흑 속 침몰하는 배에서 한 명이라도 더 찾으려고 울부짖으며 다니고, 체온을 유지하려고 서로를 부둥켜안고, 서로에게 구명의를 입혀주며 먼저 살아서 나가라 하고, 나의 눈과 입만을 쳐다보며 일사불란하게 따르던 부하들의 용맹스럽지만 애절했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최대령님이 느끼고 계실 전사한 전우들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필자의 가슴에도 가득히 전해졌다.
최영섭 대령님의 회고록 중 대한해협 편을 자세히 읽어보고 2013년 발간하신 6·25 바다의 전우들을 추가로 읽어보았다. 그날의 전투현장이 생생히 전해지며 2010년 3월 백령도 앞바다가 겹쳐지며 가슴 뭉클했다. 특히, [그들의 손을 잡았다. 두 용사가 끝맺지 못한 마지막 말“ … ”은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을 지켜다오.”로 들리는 듯했다. 전병익 이등병조는 제대를 한 달 앞두고 있었으며 곧 결혼할 약혼녀 사진을 군복 윗주머니에 간직하고 동료들에게 자랑하곤 했다]는 부분을 보며 천안함 전사한 전우들이 생각났다. 그들 중에도 결혼을 앞두고 전사한 이도 있었고 전역을 한 달 앞둔 이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안타까운 사연들이 있다.
불변한 진실은 우리 천안함과 104명의 용사들은 1950년 최대령님이 전우들과 목숨 바쳐 지켜내신 우리 바다, 1953년 이후 정전상태인 한반도의 서해에서 국민이 주말을 시작하며 편히 쉬던 금요일 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선조들이 피땀 흘려 일군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지시된 위치에서 임무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회고록 말미에 최대령님께서 강연 중 강조하시는 말씀이 뇌리를 스친다. “36년 만에 잃었던 나라를 찾아 세웠다. 일제 때는 우리가 나라를 지키고 싶어도 나라가 없어서 못했다. 대한민국은 소중한 우리들의 보금자리다. 우리들은 이 나라를 잘 가꾸고 지켜야 할 군인이다. 조국의 군복을 입고 조국의 총대를 들고 내가 지켜야 내 조국이 있다는 것이 그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우리나라를 말살하려는 적은 소련의 앞잡이 김일성 공산당이다. 조국통일 전선에서 장렬히 전사할 때 ‘대한민국 만세’를 드높이 부르며 통일조국의 밑거름이 되자. 이것이 이 시대에 사는 우리의 책무이고 군인의 본분이며 또한 보람이다.”
평화는 공짜가 아니다. 긴 세월 외세의 침략에 맞선 호국영령들의 희생이, 한국전쟁 당시 백두산함의 목숨을 건 치열했던 대한해협 전투와 김창학, 전병익 같은 분들의 희생, 생면부지의 땅에서 쓰러져간 연합군 장병들, 최근에는 천안함, 연평해전, 연평도 포격전 등에서 장병들의 숭고하고 값진 희생이 있었기에 현재의 평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는 언제 또 깨질지 모를 평화를 지키기 위해 평소에 그분들의 희생을 기리고 항재전장의 각오로 적과의 일전을 준비해야 한다.
이 회고록이 국군장병들에게는 강인한 정신무장을 국민에게는 평화가 공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우는데 크게 도움이 되는 소중한 저서라 생각한다.
2016년 최대령님께서 문산호 전사자 현양 추진을 하지 않으셨더라면 ‘장사상륙작전’ 전투는 영원히 잊혀진 전투가 되고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학도병들은 억울한 죽음이 될 뻔했다.
이후 해군에서 기념비도 설치하고 민간에서는 영화로도 제작되어 그제서야 국민들이 ‘장사상륙작전’을 알게 되었다.
이처럼 최대령님은 호국의 산증인이시며 자체가 대한민국이신 분이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서 후배들에게 경험을 들려주시고 목숨으로 지키신 우리 대한민국 호국의 국가대표로 우리들 가슴 속에 영원히 기억되기를 기원한다.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출판사 서평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모든 이들의 자서전”

선우정 조선일보 논설위원

책을 읽으면서 아버지 세대를 생각했다. 아버지는 이 책의 필자보다 6년 앞선 1922년에 태어났다. 일본제국의 조선인으로 삶을 시작했고 일제가 식민지에 이식한 근대 관학(官學)의 수혜를 입었다. 북한 출신의 월남자였고 한국을 지키기 위해 6.25 전쟁에 직업 군인으로 참전했다. 일생 동안 공산주의를 배척했고 자유주의를 옹호했다. 아버지의 자서전을 읽는 듯했다.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모든 이들의 자서전이 될 것이다.
아버지 덕분에 ‘전쟁세대’로 불리는 사람들을 자주 접했다. 아버지를 포함해 친구 대부분이 전쟁을 경험한 군인 출신이었다. 그 중에는 일본군으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다가 살아남아 한국군으로 다시 6.25 전쟁에 참전한 사람들도 있었다. 심지어 가미카제특공대 출신까지. 자살 특공 이틀 전 전쟁이 끝나 목숨을 구했다고 했다. 그때 구한 목숨으로 나라를 지키겠다며 북한과 싸웠다. 그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통음(痛飮)을 했다. 취하면 군가를 불렀다. 전쟁 스트레스를 그렇게 풀다가 대부분 70세 전후에 세상을 떴다. 아버지도 그랬다. 이 부분에서만 최영섭 대령님이 내가 아는 아버지 세대와 다르다.
나는 그들이 한국 역사에서 최고의 지성적 세대였다고 생각한다. 지금 신문의 어떤 칼럼도 1960~70년대 칼럼의 깊이를 따라가지 못한다. 지금 어떤 잡지도 당시 사상계의 깊이와 넓이에 못 미치는 것과 같다. 그들은 할 말을 마음껏 할 수 없는 시대에 살았지만, 지금 우리보다 훨씬 멋지게 세상을 얘기했다. 지금은 할 말을 할 수 있는 시대이지만, 누구도 그들처럼 세상을 표현하지 못한다.
한국 사회는 그들이 받은 교육을 일제의 황민화 교육이라고 쉽게 규정한다. 이런 시각으론 해방 후 사회 주역이 된 전쟁 세대가 고도 성장기에 분출한 폭발적 발전 동력을 이해할 수 없다. 보통학교(현 초등학교)를 3번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고학으로 도쿄의 시립중학교(현 중·고등학교)를 나온 최 대령님의 이야기는 그 시대의 다른 면모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교육만이 발전 동력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제·해방·건국·전쟁·발전의 체험, 그리고 그곳에서 우러나오는 깊이가 그들의 원초적 동력이었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다가 반가운 이름을 발견하고 휴대전화 문자를 보냈다. 2016년 최영섭 대령님의 도쿄 학창시절 추억여행을 함께 한 양인집 사장님이다. 2000년대 중후반 도쿄특파원으로 일할 때 진로재팬 사장이던 그를 만났다. 일본 스포츠의 상징인 도쿄돔 한 가운데 커다란 진로 광고를 붙인 인물이다. 야구 중계를 볼 때마다 진로 광고판이 태극기처럼 보였다. 양 사장님의 부친이 최 대령님과 해군사관학교 동기였다는 사실을 책을 통해 알았다. 최 대령님의 둘째 아들 재형과는 진해 파랑새유치원 동창이라고 한다. 양 사장님이 이런 답글을 보냈다.

“그 어른은 도쿄 한가운데에서도, 서울에서도, 밖에서도, 댁에서도 건배사는 ‘대한민국!’ ‘만세!’입니다. 어른이 ‘대한민국’ 하면 재형과 저는 ‘만세!’ 하고 받아야 합니다.”

답글을 읽고 책에 실린 대한해협 해전의 막바지 장면이 떠올랐다. “두 중상자에게 다가갔다. ’이겼다. 정신 차려’ 소리쳤다. 이들과 승리의 기쁨을 같이 하고 싶었다. 두 용사는 마지막 기력을 다해 숨을 몰아쉬며 ‘대…한…민…국…’ 말끝을 맺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그들의 손을 잡았다. 두 용사가 끝내지 못한 마지막 말 ‘…’은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을 지켜다오’로 들리는 듯했다.”
이런 생각을 했다. 최 대령님은 건배사를 통해 두 용사가 끝내지 못한 말을 후세대의 입으로 반복해 듣고 있는 게 아닐까. 체험의 깊이는 이런 것이다. 아버지와 친구들이 부른 군가가 그냥 노래가 아니듯. 그 깊이는 우리 세대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거리에 있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를 전승(傳承)을 통해 간접 체험하고, 그 체험을 다시 전승을 통해 후대에게 물려줘야 한다. 기억의 전쟁이라고 한다. 지금 대한민국 역사가 판타지 수준으로 왜곡된 것은 이 전쟁의 어두운 결과를 반영한다. 대한해협해전처럼 이 자서전이 기억의 전쟁에서도 역전의 전기가 되길 기대한다.

이 책을 관통하는 대표 키워드는 애국심이다. 애국심을 뜻하는 ‘패트리어티즘(patriotism)’은 향토애(鄕土愛)에서 비롯된 말이다. 향토는 가족의 터전으로서 영속적 가치를 지닌다. 한국인은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를 혼동한다. 나라를 잃은 시대, 즉 ‘한국민’이 없던 시대에 ‘한민족’ 개념으로 아이덴티티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두 개념을 분명히 구분했다. 북한 출신 실향민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고향은 평안북도 정주였다. 김일성 정권에 의해 향토를 잃었고 가족도 갈라졌다. 그 그리움이 애국의 기본이었다. 최 대령님 역시 북한 지역인 강원도 평강이 고향이다. 이렇게 책에 기술했다.

“통일과나눔 재단이 주최하는 경원선 침목 나눔 행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가족 4대는 행사에 동참했다. 아들·손자·증손자 이름으로 된 7장의 기부약정서를 재단에 보냈다. 후손들이 경원선을 타고 고향 평강에 가봤으면 하는 마음에 기부를 결정했다.”

디아스포라는 세계로 흩어졌지만 정체성을 유지하며 사는 유대인을 말한다. 시온주의는 향토로 돌아가려는 유대인의 열망이다. 실향민이 가진 두 특성을 책의 이 대목이 압축해서 말해준다. 아버지도 가족과 함께 경의선을 타고 정주로 달려갈 날을 기다렸다. 그리고 빼앗긴 향토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그가 전쟁에서 지켜낸 대한민국에 그대로 투사했다. 김일성 정권을 민족의 개념으로 감싸려는 시도와 일생 싸웠다. 그것이 아버지의 애국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애국이 민족에 오염된 애국이 아니라 애국 본래의 모습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최영섭 대령님의 애국, 이 책이 말하려는 애국과도 일치한다.
또 하나, 이 책에선 정말 ‘대한민국스러운’ 가족을 전형을 만날 수 있다. 다음은 가족에 대한 최 대령님의 기술이다.

“필자의 삼형제 모두 직업 군인으로 복무했다. 둘째는 해병대 대령, 셋째는 해군 전자 부사관으로 전역했다. 아들은 네 명이다. 첫째 재신은 해군 대위, 둘째 재형은 육군 법무 중위, 셋째는 공군 군의 대위, 넷째는 육군 소위로 군복무를 마쳤다. 형제·아들·손자들의 군 출신 성분이 육·해·공·해병대 등 모든 군종을 망라하고 있다. 필자가 통합군사령관이 된 셈이다…참모장인 맏며느리를 정점으로 일사불란한 위계질서를 지키고 있다…설날 가족모임은 이렇게 진행한다. ①국기 게양 ②국기에 대한 경례 ③국기에 대한 맹세 ④애국가 제창(4절까지) ⑤묵념 ⑥예배 ⑦강화(講話) 순이다. 강화는 통합군사령관이 한다…”

이 책을 읽고 최 대령님의 차남 최재형 감사원장의 인격이 어떤 가정 환경에서 형성됐는지, 그 오랜 의문도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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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정보

서평 / 03

추천사 / 08

차례 / 14

붓을 들면서 / 18

제1막 0세∼13세(1928년∼1941년) 유소년 / 24

1928년 4월 2일

아버지 최병규

강원도 평강

3개의 소학교 졸업장



제2막 13세∼17세(1941년∼1945년) 일본 도쿄(東京)유학 / 46

일본 동경 유학길에 오르다.

고학(苦學)으로 중학교 공부

미군의 대공습과 귀국



제3막 17세∼19세(1945년∼1947년) 해방정국 / 62

유진보통학교?평강중학교 선생

소련군 북한 진군

38도선을 넘어 남한으로

쪽지 가필사건



제4막 19세∼22세(1947년∼1950년) 해군사관학교 / 78

해군사관학교 제3기 입교

해사 2기생들의 파란(波瀾)

생도대장님, 이번 대대장 생도는 선거로 뽑으시죠

소위 임관, 최초의 전투함 백두산함 갑판사관으로 부임하다





5막 22세~25세(1950년~1953년) 6?25전쟁 / 100

대한해협해전

서해안봉쇄작전과 여수철수작전

서해도서탈환작전과 인천상륙작전

동해진격작전과 성진철수작전

제2차 인천상륙작전

해군사관학교 생도 훈육관 겸 항해술 교관

미 구축함 로완함 연락장교

PCS-201정(수성) 정장



제6막 25세∼40세(1953년∼1968년) 휴전 후 해군복무 / 214

신병훈련소 훈련부장

PCEC-51함(노량) 인수

PC-701함(백두산)에 다시 승조하다

해군본부 기획부 근무

PCEC-53(한산) 함장

한국함대사령부 행정참모

국가재건최고회의 총무비서관

DD-91함(충무) 함장

한국함대 제51전대사령관

해군사관학교 부교장 겸 생도대장

해군대령으로 셀프 전역



제7막 40세∼67세(1968년∼1995년) 경제?사회 활동 / 314

한국냉장주식회사 영업이사

남양사(南洋社) 전무

이란에서 기업 활동

삼선공업주식회사 사장

명지화학과 인생 최대의 시련

수리산캠프와 계룡학당







제 8막 67세∼현재(1995년∼현재) 한국해양소년단 봉사 / 346

한국해양소년단 고문

호국안보강연

대한해협해전 현양

제2차 인천상륙작전 현양

LST 문산호 전사자 현양

해군어린이음악대 음반 발견

전사서 편찬

72년 만에 일본 동경 방문

해군사관학교 3기생 셀프 회장

육?해?공?해병대 통합군사령관

백운 막벨라동산



붓을 놓으며 / 438

부록 / 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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