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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식민지 경성을 뒤바꾼 디벨로퍼 정세권의 시대)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식민지 경성을 뒤바꾼 디벨로퍼 정세권의 시대)
저자 : 김경민
출판사 : 이마
출판년 : 2017
ISBN : 9791186940181

책소개

20세기 초, 경성에서 펼쳐진 부동산 개발의 역사!

서울의 명수이자 서울 여행의 핵심인 북촌은 한국 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체험하는 장소로 1920년대 이후 근대적 부동산 개발을 통해서 만들어 진 곳이다.『건축왕, 경성을 만들다』에서는 서울의 오래된 기억이자 레트로한 골목 여행, 걷기 여행의 대명사가 되고 있는 북촌, 익선동 한옥마을은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식민지 경성에서 펄쳐진 부동산 개발의 현장을 담았다.

정세권은 '건축왕'이라 불리며 경성의 부동산 지도를 재편하고 도시 스케일을 바꾸었다. 그는 근대적 디벨로퍼로서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적정한 수준의 주택을 대량 공급해 주거 환경을 개선하고 지역 가치를 끌어올리며 도시 발전을 이끌고 삶의 질을 높였다. 따라서 시대를 읽는 사업가의 통찰력과 기획력으로 경성 전역의 부동산 개발을 주도했다. 이 책은 식민지 경성에서 부동산 개발사업을 개척하며 근대 서울의 역사에 자취를 남긴 건축왕 정세권을 기억하는 작업이다.

저자는 정세권을 현대적 디벨로퍼, 조선 최초의 디벨로퍼로서 적극적으로 평가하며 정세권의 경성 부동산 개발의 의의를 정리했다. 이는 북촌과 익선동뿐만 아니라 서울 곳곳의 역사를 알려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1970년대, 1980년대 도시 개발이 한 세대를 지나 새롭게 재생되거나 재개발되는 시점에 돌아보는 정세권의 도시한옥 대단지와 부동산 개발은 도시 개발과 도시 재생의 차원에서 보존과 개발, 과거와 미래의 대립 구도에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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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opening 서울의 오래된 기억, 건축왕의 시대로 떠나는 레트로 시간여행

삼청동, 가회동 일대의 대규모 한옥단지인 북촌 한옥마을은 세계적인 발전을 구가하는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한가운데서 보기 드물게 600년 고도 서울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서울의 명소이자 서울 여행의 필수 코스인 북촌은 교토의 기온 거리가 서구인들에게 동양과 일본의 문화와 전통을 대표하는 것처럼 한국 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체험하는 장소다.
그런데 서울의 역사적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는 이 유서 깊고 고색창연한 지역이 1920년대 이후 근대적 부동산 개발을 통해서 만들어진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다. 최근에 서울의 힙플레이스로 떠오르며 재생되고 있는 익선동 한옥마을 역시 1920년대 경성의 한 부동산업자가 계획적으로 택지를 조성하고 건설하고 분양한 일종의 뉴타운이었다.
서울의 오래된 기억이자 레트로한 골목 여행, 걷기 여행의 대명사가 되고 있는 북촌, 익선동 한옥마을은 누가 어떻게 만들었을까. 식민지 경성에서 펼쳐진 부동산 개발의 뜨거운 현장으로 떠나보자.

1. 건축왕이라 불린 사나이, 조선 최초의 디벨로퍼 정세권
1920년대 익선동 166번지 개발을 시작으로 가회동과 삼청동 일대 북촌 한옥마을을 만들고, 봉익동ㆍ성북동ㆍ혜화동ㆍ창신동ㆍ서대문ㆍ왕십리ㆍ행당동 등 경성 전역에 한옥 대단지를 조성한 인물, 정세권은 ‘건축왕’이라 불리며 경성의 부동산 지도를 재편하고 도시 스케일을 바꾸었다. 그는 근대 도시로 변모하던 경성의 도시 개발과 주택 공급을 담당하며 정력적으로 부동산 개발사업을 일구었다.
정세권의 부동산 개발은 근대 도시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도시 문제와 주택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대단위 택지를 조성해 많은 사람들에게 주택을 공급하는 근대적 디벨로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었다. 부동산 개발의 주체인 디벨로퍼는 불법 인허가, 커미션, 폭력적인 철거, 복부인, 떳다방으로 대변되는 땅 투기판의 주범이나 브로커가 아니라, 적정한 수준의 주택을 대량 공급해 주거 환경을 개선하고 지역 가치를 끌어올리며 도시 발전을 이끌고 삶의 질을 높이는 사람이다. 정세권은 조선 최초의 디벨로퍼로서 시대를 읽는 사업가의 통찰력과 기획력으로 경성 전역의 부동산 개발을 주도했다. 이 책은 식민지 경성에서 부동산 개발사업을 개척하며 근대 서울의 역사에 큰 자취를 남긴 건축왕 정세권을 최초로 기억하는 작업이다.

2. 경성의 개발 시대, 경성 부동산 개발의 뜨거운 역사
건축왕 정세권의 시대는 일제 강점 후 낡고 오래되고 불편한 전통에서 새롭고 편리하고 현대적인 근대로 급속히 변모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이주하며 도시를 점유하고, 근대식 건물과 거리가 만들어지고, 총독부는 근대적 도시 계획을 기획하며 경성을 디자인하고 있었다. 사람과 말이 다니던 거리에 자동차와 전차가 이동할 수 있게 길을 넓히고 새로운 도로를 개설했다, 전통한옥과 초가집들은 헐리고 서양식 문화주택과 일본식 주택이 들어섰다. 급속한 도시화 과정을 거치며 인구가 과밀해져 경성은 도시 문제, 주거 문제에 휩싸였다.
바야흐로 경성은 곳곳이 파헤쳐지고 헐리고 새 도로와 새 건물이 들어서는 대개발의 시대였다. 조선인 디벨로퍼들은 일본인들에게 밀려나면서 고유의 주거지역과 주거방식을 잃어버리게 된 조선사람들을 위한 한옥 대단지를 건설했다. 정세권이 주도한 한옥 대단지 건설은 기존의 토지나 택지를 쪼개 여러 채 작은 규모의 한옥을 대량 공급해 조선인의 주거지역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또 전통한옥에 근대적인 편리함과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 도시한옥(개량한옥)들이 새롭게 공급되며 조선인의 주거환경을 일대 혁신했다. 1970년대까지 북촌을 비롯해 서울 곳곳에 남아 있던 대규모 도시한옥 단지들은 이 시기 경성 개발시대의 유산이다.
이 책을 쓴 김경민 교수는 하버드대학교에서 부동산ㆍ도시계획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도시계획 전공 교수를 맡고 있는 부동산ㆍ도시계획 분야의 전문가로, 도시계획과 부동산 개발이라는 현재적 관점에서 당대 정세권의 부동산 개발을 조명하고 그 의미와 가치를 평가하며 경성 부동산 개발의 뜨거운 역사를 서술했다.

3. 민족운동에 투신한 건축왕
건축왕 정세권은 식민지 치하에서 자수성가한 사업가로서 조선인을 위한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당대 최고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조선인 사회에 큰 족적을 남겼고, 민족자본가로서 민족운동에 재정적 기여를 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기거할 곳이 마땅치 않던 춘원 이광수에게 집을 빌려주고 주택을 지어줬고, 1929년 경성 조선인 사회의 지적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역량이 총집결된 백서 『경성편람』에 건설업계를 대표해 경성의 건축 현황을 조망하는 글을 실었다.
특히 일제에 맞서 신간회, 조선물산장려운동, 조선어학회 등에 참여하며 형성된 언론인 안재홍, 국어학자 이극로와의 동지적 관계는 정세권의 일생과 사업에 큰 영향을 주었다. 조선물산장려운동은 초기 민족운동 명망가들의 관념적인 계몽운동 차원에서 정세권의 참여로 실물 경제 운동으로 발전했고, 정세권은 낙원동에 조선물산장려회 회관을 지어 기증하며 조선물산장려회의 재정을 담당했다. 또 이극로의 열정적 활동에 감명받아 화동에 조선어학회 회관을 지어 기증했고 물심양면으로 조선어학회를 지원했다. 물산장려운동은 정세권의 참여를 분기로 흥망성쇠가 갈렸고, 갖은 고초를 무릅쓰고 참여한 조선어학회 운동은 해방 후 최초의 한글사전 간행으로 성과를 남겼다.
민족자본가 정세권의 민족운동 참여는 실제 고문을 받고 재산을 강탈당하는 등 일제의 방해와 탄압을 무릅쓴 것이었고 이후 그의 사업 역시 쇠락의 길에 빠졌다.

4. 건축왕 정세권을 기억한다는 것
건축왕 정세권의 한옥 대단지 건설은 조선인을 위한 한옥을 개량해 공급하는 것으로 조선물산(한옥)을 장려한 것이었다. ‘집장사’라는 당대의 오명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의 부동산 개발은 일제와 일본인들에 맞서 조선인의 주거지역과 집을 지킨 것이었고, 도시한옥(개량한옥)으로 조선인의 주거방식을 혁신했다. 또 대규모 택지를 조성해 여러 채 작은 규모의 주택을 대량 공급한 것은 도시 개발과 주택 공급을 담당하는 현대적 디벨로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었고, 부동산 사업가로서 대단지 건설, 주택임대사업, 불황타개 전략 등은 현대적 기업가이자 혁신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저자 김경민 교수는 정세권을 현대적 디벨로퍼, 조선 최초의 디벨로퍼로서 적극적으로 평가하며 정세권의 경성 부동산 개발의 의의를 정리했다. 또 경성 개발의 역사는 북촌과 익선동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 곳곳의 역사를 알려준다. 1970, 1980년대 도시 개발이 한 세대를 지나 새롭게 재생되거나 재개발되는 시점에 돌아보는 정세권의 도시한옥 대단지와 부동산 개발은 도시 개발과 도시 재생의 차원에서 보존과 개발, 과거와 미래의 대립 구도에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다.


책속으로 추가
“중류 이하의 계층을 위해 년부와 월부 판매제도를 강구한다”는 대목이 던지는 시사점은 매우 크다. 주택을 판매하는 디벨로퍼가 위험을 회피하고 수익을 극대화하는 방법은 판매대금을 일시에 받아서 이익을 즉각적으로 회수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년부와 월부로 받는다고 했다. 그것도 대상이 ‘중류 이하의 계층’ 즉, 중산층 이하 서민들이다. 북촌의 유명한 가회동 31번지를 건양사에서 개발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건양사는 부유층을 위한 한옥집단지구도 건설했다. 그러나 그는 글에서 서민들을 위한 한옥을 건설하고 그들이 월부로 집을 구할 수 있는 편의를 제공한다고 밝히고 있다. 일종의 주택금융모기지를 민간회사인 건양사가 제공해 주택난을 덜어 주겠다는 의도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9억 원 이하 주택 구입 시 주택금융모기지를 제공하는 기관은 한국주택금융공사라는 공기업이다. 21세기 공기업에서 수행하는 일인데, 100년 전 경성의 디벨로퍼가 서민층의 주택난을 덜기 위해 자체 파이낸스 상품(월부상품)을 개발해 시장에 내놓았고 ‘다소의 공급’ 즉, 주택 공급을 늘려 주택난 해소에 일부 기여했다고 밝히고 있다. 건양사의 자본력이 안정적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며 또 그 자본의 규모가 매우 크고 주택금융에 대한 노하우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_69쪽

정세권은 건양주택의 장점으로 위생적이고 실용적이고 경제적이라는 점을 들었다. 수도시설을 한옥 내부에 설치하고 부엌바닥에 타일을 깔거나 석탄 아궁이를 설치해 기존의 한옥이 가지고 있던 위생상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햇빛이 잘 드는 남쪽 면을 넓게 설계하고, 집 내부의 이동을 효율화하기 위해 방과 부엌 등의 공간을 위계를 고려해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그리고 식당, 세탁장, 하수구 등이 모두 물을 사용하는 주방에 인접해 사용이 편리했다. _91쪽

신문, 잡지에 나왔던 분양광고와 건양사 회사 주소지 그리고 가족의 증언과 등본상 주소를 역추적해 종합적으로 건양사의 개발지역을 지도화하면 다음 쪽 〈그림 15〉와 같다. 1920년대와 1930년대 건양사의 황금기 시절, 정세권의 개발 지역은 청계천 이북 대부분과 경성 외곽 지역(오늘날로 보면 교외 지역)에 걸쳐 넓게 분포한다. 물론 해당 지역 전체를 개발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경성의 대부분 지역을 커버하고 있다. 더군다나 광고와 가족의 등본상 주소에 나와 있지 않는 개발 지역이 있다고 추정할 수 있으므로 정세권의 개발 규모는 더 클 것이다. 건양사 경성 개발의 규모와 방식이 함의하는 도시개발ㆍ계획사적 의미는 필자의 견해로는 상당하다. 건양사의 사업 유형과 개발 방식은 미국 교외주택단지의 선구자인 레빗 사Levitt & Sons, Inc에 필적한다. _99~100쪽

제2차 세계대전의 파고 속에 남산주회도로 선상에 대규모 일본인 주거단지를 건설한다는 일제의 계획은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다. 만약 일제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워 왕십리 일대 토지를 대량 매입하고 왕십리와 보문동 일대의 일본인 주거단지 개발을 마무리했다면, 조선인들은 사대문 안 북촌 지역에 몰려 사는 형국이 되어 공간적으로 일본인 주거지가 조선인 주거지를 포위하는 양상이 될 수 있었다. 또 빈곤한 조선인들이 경성에서 더 먼 지역으로 쫓겨나고 있는 상황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인 주거단지의 분절을 가져올 수 있었다. 그렇기에 정세권과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왕십리 토지 전쟁’은 도시계획ㆍ개발사적 의미가 상당하다. _115~116쪽

그는 21세기 부동산 디벨로퍼들도 못하는 일을 이미 100년 전에 진행한 걸출한 대자본가였다. 건양사는 부동산과 관련한 모든 영역-토지 매수, 기획, 설계, 시공 그리고 금융-을 포괄했다. 건양사는 자기 자본을 바탕으로(당시 차별적 금융으로 조선인 디벨로퍼들은 은행 융자가 쉽지 않았다) 토지를 매입하고, 본인 회사 또는 방계 시공 협동조합들을 활용해 한옥집단지구를 건설했다. 주택 개량에 주안점을 두었기에 주택 개량에 힘써온 박길룡(우리나라 최초의 건축가로 평가받는 인물)이 정세권 휘하에서 근무했고, 조선일보와는 공동으로 주택개량 공모사업(주택설계도안 현상모집)을 벌였다.
그 자신이 직접 주택 품질을 확인하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 새로 건축한 건물에 거주했다. 많게는 1년에 10여 차례나 이사를 다니곤 했다. 또 주택매입자금이 부족한 서민들을 위해 전월세를 낮춰서 받는 방식으로 주택금융을 직접 제공하기도 했다.
경기가 위축된 시기에는 분양 전략을 탈피해 대규모 주택 임대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기도 했는데, 2015년에 들어서야 우리나라 건설회사들이 분양시장 이외의 민간 임대주택 시장에 진출한 데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사업 전략은 시대를 한참 앞선 것이었다. _195~1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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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정보

프롤로그

1. 경성의 토지 전쟁
경성이냐 게이조냐
1920년대 경성의 인구 폭발
북촌으로 북진하는 일본인들
북촌의 토지 전쟁

2.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조선계 근대적 디벨로퍼의 출현
북촌 한옥마을의 탄생
경성의 건축왕
기회의 땅 북촌에 터를 잡다
전방위적 부동산 거대 기업을 일구다
건축왕의 불황 타개 전략
80년 전의 대규모 기업형 주택임대사업
개량 한옥의 브랜드 건양주택
건양사 경성 개발의 역사와 의미 : 규모의 경제, 표준화, 규격화
왕십리 토지 전쟁 : 일제의 뉴타운 개발에 맞서다

3. 민족운동에 투신한 건축왕
신흥 민족 자본가와 민족 언론인의 연대 : 평생의 동지 민세 안재홍
조선물산장려회를 재건하다
“백난중분투하는 정세권 씨에게 감사하라”
조선물산장려운동의 분열과 위기
낙원동 300번지 붉은 벽돌집의 추억
건축왕 조선어학회에 참여하다 : 고루 이극로와의 인연
고난에 처한 건축왕 : 일제의 탄압과 재산 강탈
감격의 큰 사전
건축왕의 최후

에필로그 : 기농 정세권을 기리며


그림 목록 및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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