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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변화인가 변질인가 (건강한 교회 회복을 위한 95가지 제안)
교회, 변화인가 변질인가 (건강한 교회 회복을 위한 95가지 제안)
저자 : 이광호
출판사 : 세움북스
출판년 : 2015
ISBN : 9791195290888

책소개

종교개혁 정신과 교회의 역사를 통해 우리의 예배와 교회생활, 신학과 목회는 물론 국가와 민족의 문제를 살펴보는 『교회, 변화인가 변질인가』. 6년 간 연재해온 《한국 교회, 무엇을 개혁할 것인가》에 대한 해설을 모아 엮은 책이다. 한국 교회와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자신의 역할을 올바로 직시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써내려간 내용들을 담고 있다.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출판사 서평

- 2015년 한국교회를 향한 강력하고 명쾌한 진단!

- 종교개혁 정신과 교회의 역사를 통해 우리의 예배와 교회생활, 신학과 목회는 물론 국가와 민족의 문제를 살펴본다.

- 이 책은 한국교회를 진지하게 성찰하며 ‘변질’에 대한 경고와 바른 대안을 제시하고 ‘변화’와 새로운 개혁을 촉구한다.



프롤로그



종교개혁자들과 개혁

진리를 위해 투쟁했던 진정한 종교개혁자들은 종교개혁을 기념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후대의 기독교인들이 자기들의 이름을 들먹이며 기념행사를 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교회사 가운데 보면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이 많다. 그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기념행사를 한다거나 기념하자고 외치는 소리 따위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길지 않은 한국의 기독교 역사 가운데도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진리를 위해 투쟁했던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일제 강점기에 복음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일본 사람들과 맞서 싸웠으며, 교회 가운데 비(非)진리를 퍼뜨리는 무리들과 싸웠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과거 진리를 위해 싸웠던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을 욕되게 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올곧은 신앙정신과 신앙적 행동은 잊어버리고 그들의 이름을 빗댄 기념행사에만 치중하는 것은 그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훌륭한 선배들의 이름을 들먹이며 기념행사를 함으로써 전혀 그렇지도 않은 자신들을 그들과 동일한 위치에 세우려고 하는 노력은 비신앙적 행위일 뿐이다.



총도 칼도 없는 시대

과거의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은 총과 칼 앞에서도 분연히 맞섰다.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잘못된 세력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았다. 총칼을 가진 자들의 협박은 그들을 괴로움에 빠뜨렸으며, 그들의 회유에 따르면 세상의 평안과 영예를 누릴 수 있었겠지만 그들은 그런 것을 거부했다.

성경에는 진리를 따르기 위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포기한 믿음의 사람들로 가득하다. 엘리야, 이사야, 예레미야가 그랬으며, 세례 요한, 스데반, 바울, 베드로 등이 그러했다. 그들은 진리 안에 살면서 외부의 잘못된 사상에 맞서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진리를 위한 투쟁에서 그들이 얻은 것은 생명의 박탈과 감옥, 그리고 고통이었다. 또한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더욱 빈번하게 그 이름을 들먹이는 위클리프(John Wycliffe), 후스(John Huss), 츠빙글리(Ulrich Zwingli), 루터(Martin Luther), 칼빈(John Calvin) 등의 신앙의 선배들 역시 복음을 위해 기꺼이 생명을 내놓은 사람들이다. 한국의 많은 신앙의 선배들도 자신의 몸을 감옥에 내어 던졌으며 모진 고문 속에서도 악의 세력과 타협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우리를 겨누고 있는 총과 칼이 없는 시대이다. 진리를 위해 투쟁하고 사악한 교권에 맞선다고 해도 총칼로 생명을 위협하는 자들이 있지는 않다. 진리의 편에 섰다가 혹 듣기 싫은 욕을 듣거나 현재 누리고 있는 지위를 잃 수도 있겠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교권주의자들 앞에서 자기의 지위를 고수하기 위해 그들에게 무릎을 꿇고 달콤한 타협의 자리를 누리고 있다면 그들은 결코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라 할 수 없다. 진리를 떠난 세속주의자들과 양손을 맞잡은 채 입으로만 종교개혁을 부르짖고 해마다 있는 종교개혁 기념 행사장들을 돌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한국 교회의 부패

한국 교회의 부패상은 이미 그 도를 넘어섰다. 이 땅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로지 천국에만 소망을 두고 살자는 것이 우리의 삶이요 고백이다. 오늘 밤에 주님이 오실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소망을 두며, ‘아멘,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라는 한마디에 우리의 모든 염원과 고백이 담겨 있다. 우리는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를 삶의 모토로 하고 있다. 그러나 남에게 그렇게 사는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고 그 말을 끊임없이 되풀이하지만 삶에서 그 의미가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위선일 수밖에 없다.

입으로는 ‘코람데오’를 외치면서 속으로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에 급급한 모습은 교회 역사 가운데 끊임없이 있어 왔다. 잘못된 교회 지도자들의 종교적 자기 목적이 강해지면 그것이 정치화하게 되고 곧 부패로 이어진다. 나아가 윤리적 부패는 신학적 위기를 불러오며 거기에는 곧 교회의 본질을 버리게 되는 파멸을 몰고 올 위험이 따르게 된다.

불법을 저지르면서도 거리낌은커녕 감투를 쓰게 되면 그것을 곧 명예라고 생각하는 교계 지도자들의 모습에서 심한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그런 자들의 안중에 참된 신학 따위는 없다. 아무리 잘못된 신학이라도 자기의 목적에 부합하면 즉시 타협하여 한편에 서게 된다. 자유주의 신학이든 세속주의 신학이든 신비주의 신학이든 문제 삼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은 결국 참된 신학에 대한 눈이 멀어 엉뚱한 오판을 서슴지 않는다. 마땅히 경계해야 할 잘못되고 위험한 신학 등에 대해서는 경계하지 않으면서 정작 참다운 신학적 맥(脈)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계산이 맞지 않으면 망설임 없이 교권의 칼을 휘두른다.

그와는 반대로 성경이 가르치는 바 개혁주의 전통의 신학적 범주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부당한 징계의 칼을 휘두르는 일이 빈번해도 그에 대해 옳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을 보기란 쉽지 않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명백한 불법을 행한 사람들에게는 최소한의 징계도 하지 않으면서 무고한 성도들을 출교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며 철저히 침묵하던 그 동일한 입술로 목소리 높여 개혁을 부르짖는다면 우스꽝스런 일이 아닐 수 없지 않은가.



‘진열장 속의 종교개혁’을 즐기는 사람들

해마다 10월 말이 되면 종교개혁 기념일로 인해 많은 교회와 기독교 단체들에서 종교개혁 기념행사를 하며 유명 인사들을 불러와 종교개혁 기념 강연을 듣는다. 사실 종교개혁 기념일이 있는 10월 말은 한국 교회에는 정치적 공한기이다. 한국 교회의 부패상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대개 부패는 노회와 총회를 앞두고 일어난다. 그러므로 봄 노회와 가을 노회, 그리고 가을에 있는 정기총회를 전후해 불법이 기승을 부린다. 치리회를 통해 논의되고 결정되어야 할 일들을 정치적 목적에 따라 몇몇 사람들이 모여 사전에 조율하는 것을 정치력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다. 노회와 총회에서 불법이 성행한다는 것은 정치적 편당이 이루어진다는 말과 통한다. 그런 잘못된 과정을 통해 노회와 총회의 임원진이 구성되면 말씀의 원리는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진리 가운데 기도와 말씀의 원리를 좇아 논의하고 결정해야 할 사안들이 몇몇 사람들의 정치력을 통해 마무리 지어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보아온 것은, 교회 내의 비리나 잘못된 행태들에 대한 개혁 의지가 전혀 없던 사람들이 10월 말이 되면 갑자기 개혁의 목소리를 높인다는 점이다. 한국 교회 정치에 10월 말이 정치적 공한기라는 점은 종교개혁 기념일과 미묘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때는 정치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 부정선거를 논의할 필요도 없고 파당적 정치를 활발하게 전개할 이유도 별로 없다. 일 년 동안 벌이던 그런 불법적 행태들이 이미 그 전에 다 끝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정치적 공백기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마음 편히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안타깝다. 우리는 일 년에 한 차례 종교개혁 기념 주일을 통해 신앙적 영웅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된다. 매주일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복음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며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받는 교훈보다 신앙의 선배들의 영웅적 이야기를 통해 감명을 받는다면 ‘진열장 속의 종교개혁’을 즐기고자 하는 소영웅주의의 이상이 될 수 없다.

우리나라에는 기독교 윤리실천이나 경제정의 실현 등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들이 많다. 그들이 세속의 부정이나 비리를 방지하기 위해 활약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맞서야 할 기독교 내부의 부정이나 비리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보통이다. 기독교 내부의 운영비리나 비윤리, 부정선거 등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는 것이다. 기독교 내부 비리에 대한 조직적 캠페인 같은 것은 거의 없다. 기독교의 후원을 받아야 할 입장에서 기독교의 부정이나 비리를 말하면 후원이 줄어들까 염려하는 것일까? 만일 그런 자세를 가지고 있다면 기독교 윤리나 기독교 정의 실천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 거룩해야 할 교회에서 일어나는 부정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세속 사회의 부정을 방지하기 위한 캠페인을 벌인다면 무언가 커다란 착각을 하고 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기념이 아니라 개혁에 참여를

이런 일들이 되풀이될 바엔 더 이상 종교개혁 기념행사를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뒤로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별별 악한 짓을 다하면서 10월 말이 되면 어김없이 종교개혁 기념행사를 거대하게 치르는 것은 교회에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해를 끼칠 수 있다. 진정한 반성이나 삶의 실천없이 해마다 되풀이하는 기념행사는 도리어 사람들의 마음을 무뎌지게 할 것이며 진정한 개혁의 걸림돌이 된다. 개혁의 의사도 없고 개혁에 참여하지도 않으면서 ‘개혁’을 주장하는 것은 위선이다. 그것은 자기를 감추기 위한 비신앙적이며 알량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종교개혁 기념행사가 아니라, 허물어져 가는 주님의 교회를 말씀의 터 위에 바르게 세우는 데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종교개혁자들의 삶을 기억하는 이유는 보편 교회를 염두에 두어 그들의 정신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목적은 과거의 개혁자들을 기념하여 높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진열장 속에 전시된 해묵은 ‘종교개혁’을 매년 한 차례씩 꺼내어 그것을 앞세워 기념행사를 하는 행위 따위는 이제 정말 그만두었으면 한다. 설사 종교개혁이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더라도 교회의 회복을 위한 진정한 몸부림이 있어야 한다. 복음을 진정으로 깨달은 성도들이라면 기독교의 부패에 대해 분연히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교회가 부정과 비리로 허물어져 가는 것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내일의 한국 교회를 위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머리말



현재 한국 교회는 교회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해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는가 하면 교인들조차도 서로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우리 시대에는 교회와 목회자들이 가장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게 되어 버렸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교회 개혁’을 입에 올린다. 더 이상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타락한 교회는 당연히 개혁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양상이 지금에 이르러 갑작스레 나타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벌써 수십 년 전부터 기독교 사회 도처에 그런 기미가 보였다. 그때 뼈를 깎는 마음으로 손을 썼어야 했다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심정이다.

벌써 십수 년이 지난 일이다. 1997년 가을, 필자는 부산에 있는 한 신학대학에서 ‘기독교 교리와 윤리’를 강의했었다. 그때 종교개혁에 관한 강의를 앞둔 수업시간에 ‘한국 교회, 무엇을 개혁할 것인가’라는 주제의 특강 시간을 마련했다. 당시 사용했던 강의안이 1998년 가을에 ‘도서출판 실로암’에서 소책자로 출간되었다. 그리고 2000년 봄에는 ‘예영 커뮤니케이션’에서 다시 출간되었다. 그 소책자로 인해 기독교 언론들 뿐만 아니라 서울에 있는 일반 언론들마저 한국 교회의 부패 원인을 분석하며 교회의 세속화를 질타했다.

그 책의 내용들은 전반적으로 교회와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실제적인 신앙과 연관된 내용들이다. 필자는 <교회>, <예배>, <직분과 회(會)>, <신앙과 교회 생활>, <신학과 목회>, <국가와 민족>에 관한 것들을 세분화하여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많은 교권주의자들은 그 책의 내용 가운데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내용이 많다고 판단했다. 결국 그 책자가 도화선이 되어 필자는 고신 교단에서 제명되는 아픔을 맛보았다. 그러나 신학자들 가운데 그 책에 별다른 신학적이며 윤리적인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이들은 없었다. 오히려 그 책의 내용은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학자가 있었을 뿐이다(부산일보, 고신대학 이상규 교수).

2007년이 저물어갈 즈음 종교개혁 주일을 앞두고 ‘크리스챤 한국신문’에서 교회 개혁에 관련된 글을 연재해 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이 교수의 교회에 대한 관심』이라는 고정란을 만들어 필자의 글을 싣기 원한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어떤 유익한 글을 쓸 수 있을지 생각한 끝에 신문사의 부탁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속적으로 발간되는 기독교 신문에 어떤 구체적인 내용을 연재해야 할지 고민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이미 출간된 「한국 교회, 무엇을 개혁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들을 해설하는 것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잖아도 그런 요구를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맨 처음 연재를 시작하면서 ‘진열장 속의 종교개혁’이라는 제목으로 인사 형식의 글을 실었다. 그 후 매호 그 소책자에 소개된 내용들을 항목에 따라 하나씩 정리해 실었지만 신문의 한정된 지면에서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아쉬움이 없잖아 있었다.

이렇게 연재를 시작하여 6년 정도에 걸쳐 필자가 계획했던 교회를 위한 신학적 소견을 신문을 통해서 밝혔다. 이제 그 내용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나오게 됨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여전히 부족한 설명들이 많지만 이를 통해 한국 교회와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자신의 역할을 올바로 직시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속담에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말이 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제 가래로라도 될까 싶은 마음이 들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침묵하고 방치할 수는 없다. 아직도 이 땅에 하나님의 편에 선 많은 교회들과 성도들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는다. 그들은 이제 교회를 위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분명한 입장을 정리해야만 한다. 그것이 주님의 교회를 지키는 일이며 어린 성도들을 보호하는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아멘,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



2015년 봄,

실로암 교회 서재에서

저자 이광호
[알라딘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목차정보

머리말·5

프롤로그 _ 진열장 속의 ‘종교개혁’·12



PART 01 교회에 대하여

1. 교회의 유일한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20

2. 교회는 신앙고백 공동체·24

3. 하나님의 주권이 실행되어야 할 영역·28

4. 모든 성도들의 평등한 신분·32

5. 교회의 울타리·36

6. 교회의 저급한 세속화 방지·40

7. 교회와 철저한 권징 사역·44



PART 02 예배에 대하여

8. 각종 기도 모임과 잘못된 신앙의 척도·50

9. 날마다 새로워져야 할 성도와 교회·54

10. 교회 공동체의 진정한 의미·58

11. ‘화상예배’의 위험·62

12. 마땅히 폐지되어야 할 형식적인 기념예배·66

13. 기독교적 결혼 예식에 관하여·70

14. 성도의 혼인예배·74

15. 기독교와 장례식·78

16. ‘추도예배’에 대한 재고(再考)·82

17. ‘생애 기념일’의 예배 형식화 문제·86

18. 목사의 종교적인 가운과 복장·90

19. 예배당 건물과 종교의례·94

20. ‘헌신예배’는 필요한가?·98

21. 교회와 예배를 위한 찬양대·102

22. 찬양대 유지를 위한 급료 지급은 잘못된 관행·106

23. ‘헌금’에 내포된 고백적 의미·110

24. ‘축도’의 의미·114



PART 03 직분과 회(會)에 관하여

25. 목사 직분의 사역과 그 범위·120

26. 장로 직분의 사역과 그 범위·124

27. 집사 직분의 회복·128

28. 공동의회와 제직회(직분회)와 사역의 중요성·132

29. 노회와 총회의 권위·136

30. ‘교권주의와 명예주의’의 폐단·140

31. 유일한 주권자이신 하나님·144

32. 직분과 정년 제도·148

33. ‘거룩한 성도’와 ‘하나님의 거룩한 종’·152

34. ‘목사 직분’에는 차등이 없다·155

35. 은퇴 목사와 공로목사 제도·158

36. 교회 정치와 계파 형성의 폐단·161

37. 회의비에 대한 잘못된 관행·164

38. 설교와 사례비·167

39. 직분자의 요건·170

40. 직분자 임직과 금전·173



PART 04 신앙과 교회 생활에 관하여

41. 술과 담배, 교회와 신앙·178

42. ‘예수님의 초상화’(?)·181

43. ‘위험한 예수님의 캐릭터’·185

44. 이웃을 위한 성도들의 선행·188

45. 예배당 내부의 불필요한 특별석·192

46. 과다한 헌금 종류와 돈의 위험성·195

47. 무기명 헌금의 원칙·198

48. 가난한 성도들을 배려하는 헌금생활·201

49. 신약 시대 교회와 ‘절기’·204

50. 교회가 세속적 기념일을 제도화할 필요가 있는가?·207

51. 기독교는 고행의 종교인가?·210

52. 절기와 특별헌금·213

53. 성도와 ‘축복’·216

54. 성숙한 신앙의 조건·219

55. ‘축복대성회’(?)·222

55. 지성(至誠)과 감천(感天)·225

57. 교회와 주일 성수·228

58. 교회와 장로들의 심방 사역·231

59. ‘돈’에 대한 성도의 올바른 자세·234

60. ‘음악’에 대한 그릇된 사고·238

61. 음악의 우상화·241

62. ‘기도 합주회’·244

63. 한국식 통성기도·247

64. ‘설교 대회, 설교 연습’·250

65. 기독교에는 영웅이 없다·253

66. 성도와 올바른 기도·256

67. 교회의 세속화에 대한 우려·259

68. 성도의 ‘성(性)적인 순결’·262



PART 05 신학과 목회에 대하여

69. 신학교의 세속화·266

68. 목회에 성공과 실패가 있는가?·270

69. 교회와 예배당·273

70. ‘총동원주일’(?)·276

71. ‘전도’에 대한 오해·279

72. 참된 신학과 건전한 비판 정신·282

73. ‘무인가 신학교’와 ‘인가 신학교’·285

74. 세속화된 신학교의 왜곡된 입학 특전·288

75. 신학교와 성경 교육·291

76. 오염된 자랑과 부패한 기득권·294

77. 한국 교회와 신학 사대사상·297

80. 개혁주의 신학과 ‘오직성경’·301

81. 교회와 세상의 경력·303

82.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사자’·306

83. 목사의 사역지 이동·309

84. 천국의 상급에 차등이 있는가?·312

85. 교회와 세례의 중요성·315

86. ‘복음화’에 대한 착각·318

87.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에 연결된 하나의 공동체·321



PART 06 국가와 민족에 관하여

88. 남북통일이 하나님의 뜻인가?·326

89. ‘3.1 운동’이 기독교의 공로인가?·329

90. ‘8.15 해방’이 우리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인가?·332

91. 민족복음화 운동의 문제점·335

92. 예배당 내부의 ‘태극기’·338

93. ‘국기에 대한 경례’와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341

94. 기독교와 ‘민족주의 및 국가주의’·344

95. ‘국가를 위한 조찬기도회’(?)·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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